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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민성을 정치인들이 만든 사례를 보여준다

서울사는부울경사람

때는 전두환 정권 때임.

반공이 국시인 시절이므로 보트피플을 구한건

오히려 그 시절 가치에 적합했다고도 볼수 있음.

 

그런데 이런 대우를 받았음. 

 

이런 분위기에서 어느 누가 자기 독자적으로

'건전'하고 '상식'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수 있겠음?

 

구성원, 즉 국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만드는것도 정치인들이 갖춰야 하는 자질임 

 

한국의 고질적인 눈치보고 아무것도 안하는, 흔히 개돼지라 부르는 국민성은 정치인들도 50% 이상은 만든거임

 

 

 

보트피플 96명의 영원한 산타

2014.12.28 20:46

 

장세정 기자 송봉근 기자 

30년 전 남중국해에서 보트피플(베트남전쟁 난민) 96명의 생명을 구했던 전제용(74·사진) 광명87호 선장은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각별하다.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뒤 미국에 정착한 피터 누엔(70) 등이 편지 연락이 닿은 2002년 이후 ‘친애하는 캡틴’이라고 부르며 성탄절 카드와 선물을 보내오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22일 경남 통영의 바닷가에서 만난 전 선장은 “난민을 구조한 뒤 우여곡절을 좀 겪었지만 지금 나는 누구보다 많은 외국인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 선장은 30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1985년 11월 14일 베트남 인근의 남중국해. 참치잡이 원양어선 광명87호(400t)는 2만여 마리의 참치를 가득 싣고 부산항을 향해 가고 있었다. 1년가량 거친 바다 위에서 생활해온 전제용(당시 45세) 선장과 24명의 선원들은 만선(滿船)의 기쁨에다 가족과 재회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오후 5시쯤 갑자기 좌현(左舷) 500m 전방에 4t짜리 목선이 눈에 들어왔다. 갑판 위에서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미 대형유조선과 컨테이너선 등 25척이 이들을 외면하고 지나친 뒤였다.

 

전 선장은 속도를 낮추라고 지시하고 간부급 선원들을 급히 불러모았다. 당시 정부는 난민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난민을 구조하면 어떤 불이익이 생길 수 있는지 설명한 뒤 전 선장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이후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말했고 선원들도 선장의 결정을 따랐다. 식량과 식수가 바닥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난민들에게는 ‘기적의 유턴’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전 선장은 본사에 구조 사실을 보고했으나 “인근 무인도에 하선(下船) 조치하라”는 회신이 왔다. 전 선장은 “난민을 무인도에 내려놓으면 국제해사법 위반이라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본사의 지시를 따를 수 없는 이유를 타전했다.

남은 25명분의 식량을 121명이 나눠 먹고 버틴 끝에 12일 뒤 광명87호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목숨을 구한 난민들은 1년6개월 뒤 미국·프랑스·오스트리아로 보내졌다. 반면 전 선장과 선원들은 귀국 직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에 불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얼마 뒤 해고됐다. 통영수산고를 졸업한 뒤 남들이 선망하던 원양어선 선장 생활 11년 만에 갑자기 쫓겨난 전 선장을 받아주는 해운회사는 없었다. 어렵사리 3t짜리 배를 장만해 어부가 됐지만 2년반 만에 빚만 진 채 그만뒀다. 94년부터 21년째 고향인 통영 앞바다에서 멍게 양식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난민을 구조한 그는 배에서 쫓겨났지만 끝내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74세의 나이지만 전제용 선장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어장에서 2년생 멍게 수천 마리를 건져와 육지에 만든 배양장에서 산란과 부화 작업을 하고 있다. 전 선장은 멍게를 친자식 대하듯 살갑게 대했다. 멍게의 몸에서 우윳빛 수정란이 뿜어져 나오자 “사람이든 미물이든 생명의 시작은 똑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자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선원법상 의무를 말하기 이전에 상식”이라며 “요즘은 인성(사람됨) 교육이 너무 안 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에게 고통을 준 30년 전의 ‘남중국해 유턴’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을 구조해 내가 쪽박을 찼던 것은 맞지. 사람이 죽어가는데 누군들 그렇게 안 했을까. 내가 그때 그 사람들을 외면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야.” 그러면서 그는 “ 사람들이 돈에 너무 집착하는데 죽고 나면 돈이 무슨 소용 있느냐”고 반문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가면서 살 수 있으면 그게 행복”이라고 했다.

 

전 선장은 대뜸 어머니(93)의 근황을 들려줬다. 치매를 앓고 있는데 가끔 기억이 돌아올 때면 어김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제용이가 어떤 아들인지 아는가. 90명 넘는 사람들 목숨을 구했다”며 웃는다고 한다.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읊었던 통영 출신 시인 청마 유치환의 ‘행복’ 마지막 구절이 전 선장의 얼굴과 겹쳐졌다.

 

통영=장세정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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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켈켈켈
    2024.01.25

    보트피플이 월맹 공산독재정권이 싫은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해도 거기에 자유대한민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월맹 간첩들이 들어있어서 어쩔 수 없긴 했었음.

    당시 월맹 정권이 보트피플들 그냥 나가라고 떠 밀은 판이어서

  • 켈켈켈
    국가영도위원회
    @켈켈켈 님에게 보내는 답글

    나가라고 떠 밀은 판이 아니라 선상난민들이 죽음을 피해 탈출한 것으로 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