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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과 진보사이 NL계 경기동부연합에 대해 알아보자 (NL계의 몰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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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홍 조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 글은 수십 년 동안 폭력과 빈곤때문에 막장으로 낙인찍힌 도시(광주대단지-성남시)에서 성장한 인물들이

사회의 차별과 배제의 기억을 동력원 삼아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지역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으나

결국 기억의 고착과 운동의 퇴행으로 고립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글 입니다.

 

 

1980년 -

초기 성대련(성남대학생연합)은 단순히 성남출신 대학생들의 모임이였으나

 

1984년의 성대련은 각 대학 학우회들의 대표격같은 존재로 거듭났다.

 

1987년 6월항쟁은 전국 각지에 대중운동이 부흥하게 되는 계기를 낳았다.

그중 성남에서는 1988년 1월 성남청년회가 결성되었는데 

6월 항쟁은 광주대단지사건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투쟁의 기억을 계승시켰고

청년회 조직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학생시절엔 노학연대 투쟁에 참여했고 성남시와 관계를 맺다가

졸업한 뒤엔 성남공단에 취업하거나 청년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전국연합의 출범과 함께 성남연합이 결성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은 민주당을 지지하던 세력이 대거 떨어져나가며 한층 급진적으로 변하기도 했던 시기였는데

문민정부출범 이후 이들은 운동가 중심에서 대중중심으로 바꾸면서 성남청년회나 분당청년회(93년)같은 청년학교를 만들었다.

 

그렇게 조직력은 강력해졌고 1996년엔 이들을 중심으로 '전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북한에 수재가 났을 때 성남연합에서 가장 먼저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전개했다.

회원 50여 명이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을 전개, 3개월 동안 무려 1만5000가구를 방문해 5500가구한테서 220가마의 쌀을 모았으며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3619517?sid=104

관련기사

이듬해인 1997년에는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즈음 성남연합은 용인, 광주, 하남, 이천, 여주를 합쳐 경기동부연합으로 전환했다.

1998년 IMF 이후에는 실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쌀 모으기 운동 때처럼 집집마다 방문해 실태조사를 하고 운영비를 마련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이런 노력은 나중에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는 기반이 됐다.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이란? 94년 북한의 식량난이 지속되자 전국연합, 민주노총,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불교운동연합 등 26개 사회.종교단체가 97.4.10에 선포했던 인도적인 사회운동이였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4270521?sid=102

 

경기동부연합의 공동체적 생활도 그들의 전설적 활동을 뒷받침했다. 6~7명 정도의 핵심간부들은 상근활동을 했기 때문에 새벽에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해 생계비와 활동비를 충당했다. 하루 일과는 새벽 3~4시 사이에 시작됐고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PD 세력하고 비교해서 NL 세력이 집단 문화가 강하고 규율도 엄격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지역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집단성과 일체감은 광주민중항쟁의 기억으로 단련된 남총련(전남총학생회연합)에 견줄 만했다. 경기동부연합은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배제한 공동체적 삶 속에서 자주민주통일의 꿈을 키우고 집단의 기억을 더 강화해 나갔다.

 



한편 1989년부터 범민족대회* 개최 등으로 통일운동이 무르익어가고 전국연합의 결성으로 NL계가 총결집한 1990년 초중반은 많은 학생 열사가 탄생하는 시기였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학생 타살 이후의 분신정국은 13명의 분신자를 포함해 모두 25명의 열사를 낳았다.

 

이중 성남 관련 인물은 4명이다. 경원대생 천세용이 분신했고, 유서대필사건과 관련된 김기설도 성남민청련 활동 중 분신했다. 용인 외대의 남현진은 군에서 의문사했고 노동자 윤용하가 분신했다.

범민족대회

남한과 북한, 해외동포가 참여해 민간 주도의 통일운동 기틀을 다지기 위한 행사로 1988년 남측이 북한에 제안하고 북한이 이에 응하면서 진행된 세계대회
 

IE002796613_STD.jpg1991년 명지대 강경대 학생 타살 (강경대사건)

노태우 정권 타도와 학원자주화를 외치던 강경대라는 학생이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사건.

https://imnews.imbc.com/replay/1991/nwdesk/article/1846919_30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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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용인 외대 남현진 의문사 사건 관련 신문기사


1992년부터는 학생운동 관련 대학생 자살자 수가 1995년 1명, 1996년 5명, 1997년 1명으로, 7명 중 4명이 용성총련 소속이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가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1980년부터 헤아리면 1980년 김종태의 분신을 시작으로 모두 17명이 자살하거나 의문사했다. 매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추모제는 경기동부연합의 집단성과 일체감을 더 강화시켰다.

 

경기동부연합은 한총련에도 영향을 주는데 95년부터 종북스럽게 폭주하기시작... 이건 이글에선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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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00년..

PD(평등파)계열은 민주노동당을 만든다.

1996년 노동자법이 날치기 통과될때 총파업을 했던 민주노총은 정치영역에서 노동자를 대표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정당을 만든것인데

이때 여러 NL계의 전국연합과 민주노총등 다양한 사회운동 세력이 결합했다.

결합한 세력중 경기동부연합은 몇 년뒤 당내 최대 정파로 성장한다.

 

민주노동당은 초기엔 PD계열이 강했고 NL계는 끽해야 울산연합정도가 당원으로 뛰던 정당이였으나

민주노동당이 생각보다 잘나가자 2005년부터 경기동부연합이나 범경기동부연합세력*이 당원으로 가입을 시작한다.

이들은 갖가지방법을 동원하여 민주노동당의 당직을 서서히 접수해나가며 자신들의 세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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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경기동부연합세력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이 주 세력인 연합

서울 고려대를 주축으로 했던 한총련이 96년 연세대 폭동을 일으킨데다

이석이란 학생을 죽이기까지하여 98년 이적단체로 찍힌뒤

김대중의 한총련 사냥으로 서서히 힘을 잃자 용성총련이 따로 떨어져 나와 남총련과 연합하여 만든 세력.

71년 광주대단지사건으로 탄압을 받고 광주민주화운동때 탄압을 받았다는

국가폭력의 경험을 공유한 이들은 일반노조..특히 건설 노조를 통해 민주노총내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렇게 민주노동당을 장악한 경기동부연합은 2007년 대선에서 국민들의 관심사인 부동산이나 물가문제가 아닌

코리아연방 같은 구호를 외치며 선거 참패를 당했고

 

일심회사건이나 여러 굵직한 NL(자주파)계의 병크를 보다 못한 PD(평등파)계는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만든다.

 

 

NL계가 주축이 된 민주노동당... 이대로 갈라지나 싶었지만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자살사건으로 정국이 바뀌어 버린다.

 

민주노동당은 적극적으로 야권연대를 노렸고

 2010년 6.2 지방선거 참패를 겪은 진보신당내 통합파 세력과

노무현정부 보건복지부장관출신 유시민을 주축으로한 국민참여당을 등을 끌어들여 진보대통합을 꿈꾸게 된다.

여담 진보신당내에서는 유시민을 반대하는 민주노총과 좌파단체가 합당에 대해 계속 부결의견을 내었고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가 진보신당을 탈퇴하여 새진보통합연대를 만들고 통합에 힘을 실었으며

진보신당에 남은 사람들은 국민참여당의 남은 사람들과 시민통합당을 만들어

민주통합당을 만드는데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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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통합된 정당들은... 통합진보당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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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통합진보당의 구성도이다.

보다시피 각기 다른 정당들이 합쳐졌기에 성향이 제각각이다. (중도~극좌)

 

참여민주주의(국민참여당) + 주체사상파(당권파)+사회민주주의+진보주의

개판

 

국민참여당으로 인해 당이 점점 우경화(사회주의 강령삭제나 민주대연합론이나 연립정부론 등.) 된다며 

진보신당등은 국민참여당계를 비판했고 국민참여당계는 노동주장하며 통합에 재뿌리지 말라고 말하며 비NL계는 다퉜다.

허나 NL계는 특유의 조직력으로 19대 이석기와 김재연을 부정선거로 당선시키기위해 당내 선거결과를 조작한다.

이것이 바로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사태이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사태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이유는 진보 진영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사태 때문이었다.

부정선거는 경기동부연합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지만 ‘국민의 눈높이’와 다른 비상식적인 대응을 하면서

오히려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몰렸고 보수 진영뿐 아니라 진보 진영한테서도 집중 공격을 받았다.

 

100분 토론에서 모두에게 공격받는 모습 김정일 개개끼해봐 짤의 원본

이상규는 NL계중 온건파로써 나무위키에 의하면 저 모습이 NL계에선 반북이라고 받아들일정도라고 함

https://www.khan.co.kr/politics/assembly/article/201205252133395

세간에 돌던 찌라시가 진짜인가봐라고 신빙성이 더해진 100분토론.
그렇게 국민들에겐 종북단체 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http://biz.heraldcorp.com/view.php?ud=20120629000339

NL계 의원을 축출하기위해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이 의견을 일치시킨 모습


비례대표 사태에서 경기동부연합은 민주노동당 시절의 패권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는 자기 보존 의식이 극대화된 모습을 보였다.

경기동부연합은 ‘나머지 전부’와 자신들을 극단적인 진영 논리로 구분하고, 당권파가 아닌 세력들을 공격함과 동시에 자신들을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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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직을 상실한 후엔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국가주의, 군사정권, 마녀사냥꾼으로 규정하고,

배제당한 자신들은 유대인이자 “불가촉의 적대집단”이며, 대심문관의 판결에 따라 화형을 당한 이단자이자 마녀가 됐다.

이런 극단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진영 논리 속에 당권파는 국민을 향해 사과하는 대신 단상을 점거하는 폭력을 선택했다.

 

 

 


이런식으로 경기동부연합이 단상을 점거하는 순간 세상과 당권파 사이에 선이 그어졌다.

진보 정치 세력에서 나온 기이하고 일탈적인 회의 진행과 소음, 얼마 전까지 같은 편이던 사람들에게 휘두른 폭력, 급기야 분신까지 하게 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는 거꾸로 경기동부연합을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확신하게 만들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14/2012051401879.html?news_HeadRel

당권파가 심상정과 유시민 폭행해서 조선일보가 유시민 옹호하는 기사쓸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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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권파에게 폭행당한 조승호 공동대표는 목의 수액이 이탈하는 중상을 입고 인공관절 대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남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을 향한 공포와 혐오감이 생겨났다.

마치 광주대단지의 8·10 사건이 외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듯이 말이다.

 

 

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이 사태를 세계정당사에 유례가 없는 탄압 속에서도 동지애로 철통같이 무장해, 그 탄압을 정면으로 뚫고 나온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이 당시 분신 자살한 사람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동지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내던졌다 생각했다.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사파에 대해 알아야하는데...
1980년에 광주사태가 일어나기전에 사람들은 미국이 정의를 지켜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광주에서의 학살을 지켜보기만 했고 이로인해 반미감정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죽지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한다는 인식도 퍼져나가게끔했다.

모든 시민운동은 정치적 시민운동으로 규정되었고 모든 시민운동가들은 정치적으로 생각해야했다.

정치적인것은 '우리'와 '적'을 구분하는 일이기에...

80년대 쯔음 강철서신에 의해 들어온 주체사상이 퍼져나가며 
운동가들은 서서히 진영논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북한의 주체사상은 남한정부에 저항하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주체사상이 공산주의도 뭣도 아닌 사이비스러운 이념임을 알면서도 

광주를 학살한 남한정부를 부정해야 했으므로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북한만이 적통성을 가진 유일한 정부라 믿기 시작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북한에 대한 모든 정보들이 차단되어 

현실과 완전다른 상상속의 북한이란 에덴동산이 주사파들의 머릿속에 펼쳐진것인데

훗날 김대중정부때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자 이들 대부분은 내 북한이 이럴리가 없어하고 멘붕한다.

이때 멘붕한 사람들은 뉴라이트로 전환했는데 민족주의자체를 극혐한 나머지 일본 식민지근대화론을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생김

 

남한정부는 서서히 정상화되었고 여전히 이탈하지않은 주사파들은

80~90년대에 사고가 멈춰서 남한이 완벽한 민주주의를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학생운동 하던 시기에 머물러 있다.

 

세상이 80년대처럼 그래 군부정권에 맞서다보면 그럴 수 있지라고 이해하리라 믿는 그들...

 

이들은 군대같은 결속력을 무기로 민노당을 장악했지만

후일 부정선거를 인정하지않고 기행을 벌여 사회로부터 고립이 되었다. 

그렇게 통합진보당은 해산되고 남아있는 세력들조차 원외정당으로 밀려나 몰락했다.

 

 

ps.

학생운동이 어떻게 타락하고 변질되고 오늘날같이 인식되는지 

https://theyouthdream.com/free/3337820?member_srl=79790&page=4&category=16143293

인천때 기성 정치인과 갈라진후 변천 경기동부연합을 중심으로 싹 다 훑었습니다.

 

임미리 정치학 박사님의 글에 살을 덧대거나 수정 편집한거에요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263 원본글은 여기

 

그밖에 느낀거

진영논리에 사로잡히면 내부비판이 없어서 썩어간대요 

그와 동시에 바깥으로 공격성을 표출한다는군요.

 

또한 결속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작은 흡집에도 두려워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과나 반성을 하지않으려 한다네요

 

참고자료 진보와 종북의 차이.

https://www.joongang.co.kr/article/8216442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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