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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도시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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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의시비

그날은 도시의 마지막 날이었다.

도시 안에서는 통곡과 울음소리,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벽 위에 올라선 병사들은 청년뿐 아니라 환갑은 다 되어 보이는 노인도 있었고, 열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소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도 창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진정한 용사란 은빛의 갑옷을 입은 자가 아니니라."

한 눈에 안대를 댄 한 장수가 검을 쥐고 멀리서 성벽을 바라보았다. 부장이 옆에 서서 그의 모자란 한 눈을 대신해서 더 멀리 보고 있었다. 장수가 하나뿐인 눈으로 존경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진정한 용사란 금발의 수염을 가진 청년이 아니니라. 진정한 용사란 백마를 타고 황금 칼을 치켜드는 정복자도 아니니라. 진정한 용사란..."

그가 손을 뻗어 성벽 위를 가리켰다.

"바로 저들이니라. 자신의 나라와 도시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지키기 위해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낡은 청동창 한 자루 잡고 성벽 위에 선 저들이 진정한 용사이니라. 저들이야말로 진정한 일당백의 전사이고, 전쟁의 신과 승리의 여신이 인정하는 자들이니라."

"하지만 이제 모두 죽게 됐군요."

부장이 차갑게 말했다. 장군이 피식 웃고 말했다.

"그것이 진정한 용사가 죽는 방식이니라."

= = =

"그 도시"를 포위한 군대에게는 어마어마한 물자와 지원이 도달하고 있었다. 주변의 도시들은 모조리 그 군대에게 항복했으며 각종 공성무기와 곡식을 바쳤다. 본국에서 보내오는 지원도 만만치 않았으며, 본국에서 보내는 다른 군대들도 곳곳의 "그 도시" 소속의 군대들과 싸우는 족족이 다 깨뜨리고 북상하고 있었다.

애꾸눈의 장수가 외쳤다.

"무거운 기병들은 뒤로 빠져라! 성을 공격할 때는 쓸모 없다! 가벼운 기병들도 성문을 깨뜨리면 그때 진입하라! 그때까지는 보병과 공성부대가 모든 것을 수행하리라!"

"예!"

일사불란하게 착착 전투 준비를 해 나가는 군대는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괴수를 연상케 했다. 위대한 대국의 막강한 군대였기에 그 군대의 이름값은 틀림없이 해냈다. 결코 이겨낼 수 없는 군대. 싸우다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이길 수는 없을 운명에 떨어진 "그 도시"의 시민들. 장수는 그 시민들에게 진정한 경의와 존경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이지 않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 =

마침내 해가 지고, 땅거미가 대지를 따라 천천히 스멀스멀 번져 들어왔다. 어둠은 태양빛보다 훨씬 빨리 움직이고 번지기 마련이다. 군대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어둠이고, 그렇기에 태양빛보다 빨리 움직이고 번져 나가는 군대만이 승리할 수 있다.

"운제(雲濟. 구름다리. 여기서는 사다리차를 가리킴)는 앞으로 나아가라! 투석기들은 돌을 던져라!"

투석기들이 일제히 돌을 날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견고한 성벽에 투석기들이 격돌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양쪽 군대의 독전고 치는 병사들이 팔이 떨어져라 북을 두들겨 댔지만 투석이 성벽에 작렬하며 일으키는 굉음에 묻혀 버렸다.

"온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일제히 장대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장창도 아니고 창 촉 만들 쇠붙이도 모자라서 뾰족하게 깎은 장대나 들이밀고 있는 "그 도시"의 군대는 운제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투석기의 요란한 공격에 장대 세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압도적인 숫자의 운제들이 성벽에 자기 사다리를 들이댔다. 이어서 공격군이 앞으로 진격해 오면서 일제히 불화살을 갈겼다. 물론 불화살은 날아가면서 꺼지기 일쑤인지라 천 발 날려도 대여섯 발 제대로 붙 붙기 힘든 무기이므로, 수비군이 맞는 것은 별로 위력적이지 않고 불도 안 붙고 사거리도 짧으며 그냥 좀 묵직한 화살들이었다. 그것은 별로 강한 무기가 아니었고, 맞으면 죽었다.

투석기와 궁사들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순조롭게 전진한 운제를 향해 공격군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진격했다. 그들이 마치 지푸라기 더미를 기어오르는 나방 떼처럼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몰아닥쳤다. 성벽 위의 두 걸음도 못 갈 좁은 회랑에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늙고 병들었거나, 아니면 아주 어려 빠지거나, 둘 중 하나였던 수비군, 그리고 팔팔한데다가 노련한 공격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치는 족족 다 쓰러져 나가고 성벽 위의 회랑은 피가 흐르는 개울로 변했다.

이어서 충차(람)가 돌격해 성문에 충돌했다. 지키는 병사도 없는 성문은 맥없이 박살나고, 이어서 공격군 후방에서 때를 기다리던 무수한 기병들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안으로 쇄도했다. 성 안에 있던 여성들까지 식칼과 호미를 들고 달려나와 적 기병들에 맞섰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성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찬란하던 건물들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하고 곳곳에서 찢겨 죽은 인간의 파편이 나뒹굴었다.

= = =

뒤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던 장수가 뚜벅뚜벅 걸어서 자신의 동물에 올라탔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말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고 막강한 짐승, 코끼리였다. 그가 처음 원정을 시작할 때 데려온 37마리의 코끼리 중 여기까지 함께해 온 코끼리는 이 한 마리뿐이었다. 그는 이 코끼리에게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가 코끼리의 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돌격하라! 오늘이야말로 이곳을 무너뜨리고 우리나라의 위대한 문명을 우뚝 서게 할 날이니라!"

"우와아아아!"

보병들이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성 안에 있던 귀족들이 몽둥이며 쇠가래를 들고 물려나왔지만 기병들이 창으로 치면 버터 막대기들에 식칼을 휘두른 것처럼 숭덩숭덩 날려갔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장수의 하나뿐인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그가 달을 향해 고개를 들고 생각했다.

아버지, 보고 계십니까. 원수를 갚았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내 어머니 조국의 원수를, 나와 같은 땅에 나서 이 도시에게 생명을 빼앗긴 모든 이들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나의 조국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 = =

그 날 밤, 한니발은 로마를 함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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