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1차시
- 충선왕의 개혁정치 사례를 1가지 이상 발표할 수 있다.
<사림원의 설치>
사림원:시정에 대한 국왕의 고문기능 전주와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강력한 권력기구로 부상
사림원 중추적 역할:신진 세력인 박전지,최감,오한경,이진 등 4학사 ->신진사류에 의한 정치를 지향
충선왕 개혁운동은 세족 권문의 반발과 원의 압력으로 충선왕이 재위 8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실패
11강 2차시
- 여원관계의 변화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1259년 세조 쿠빌라이 집권기(1259∼1294), 1258년 최씨 정권 붕괴와 왕정 복고로 몽골과의 30년 전쟁(1232~1258)은 종식된다.
-이로써 고려와 원나라(1260년 이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 사 이에 새로운 관계가 전개된다.
-1270년 시작된 삼별초 반란은 1273년 두 나라가 함께 진압한다. 1274년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면서 고려는 부마국(사위 나라)이 된다.
-두 나라가 함께 두 차례(1274·1281년) 일본을 정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접어든다.
-즉, 13세기 후반 두 나라는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천자-제후국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대신 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제후국과 부마국으로서의 위상>
-제후국으로 지위 격하 : 조·종의 묘호 대신 원의 제왕諸王이나 재상의 사후 부여받는 ‘忠’자를 포함한 묘호 부여 의식·의복·용어 등 모두 제후국 체제로 격하
-정치제도의 지위 격하 : 3성 6부 및 추밀원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제 붕괴 → 첨의부 및 밀직사 양부의 4사체제로 축소
-여·원 왕실 통혼 : 충렬왕 이후 원의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부마로서 확고한 지위 보장 → 원 부마 지위를 이용하여 국내에서의 왕권 신장
<정치적 간섭의 성격과 고려의 대응>
-원 제국의 지배질서하에서 제후국으로의 위치 강등과 이에 수반하는 6사의 준수, 부마국화, 왕실지위 강등, 관제 개혁 등
-고려는 원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
-예) 충렬왕 원년(1275) 관제 변경 : 원의 관제와 관호와 일치한 것만 개정. 원에 존재하지 않는 고려의 독자적 관제 및 관호는 그대로 유지
-‘세조구제’를 앞세운 고려의 외교 : 1275년 충렬왕의 친조를 계기로 성립된 ‘세조구제’는 원의 간섭이나 입성책동 등 정치적 사안에서 반대하는 명분 제시
- 고려와 원의 교류 내용에 대하여 설명 할 수 있다.
<인적교류>
-양국 왕실의 혼인관계 → 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면에 많은 영향 미침
-몽골식 변발 및 의복 등 몽골식 생활양식의 전파
-고려인의 원 진출은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
-고려의 대몽항쟁 결과 파생된 포로·투항민·유민 원의 요구에 의해 파견된 숙위·공녀·환관, 원 제과 출신 등
-포로 : 규모면에서 절대 다수. 포로의 대다수가 공사노부로 전락되거나 일부 쇄환
-투항민 : 주로 서북계 지역. 요양과 심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방에 산재하면서 독자적인 생활권 형성 → 요양행성의 핵심 지배세력이 되어 고려정부에 많은 영향
-유민: 쌍성총관부 지역을 위시로 요양, 심양, 개원로, 북경 등지로 분포
-숙위: 몽골황실의 숙위로 출발하여 내외의 여러 관직 역임
-공녀: 지배층에서부터 일반 양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들이 원에 끌려감. 지배층 출신의 공녀 가운데 후비 및 고급 관인의 배우자되기도 함(ex, 기황후)
-환관 : 원에 진출한 고려인 중에 가장 현달하여 권세를 누린 계층. 원 황실의 총애를 통해 원의 재상 지위에 오르기도 함
<경제적 교류>
-몽골의 6사 요구: 공물의 납부 포함
-공물 이외 수요에 따라 각종 명목의 공물을 요구
-금·은·동·철 등의 각종 광산물, 도자기, 화문석, 용석·죽담 ·금선·장경지 등의 각종 수공업 제품, 비단 등 의복 재료, 곡물·인삼, 대장경 등
<종교 문화적 교류>
-종교: 원에서 유행하던 라마교, 도교, 강남의 불교 등이 수입되어 영향
-라마교[티벳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교미술에 새로운 영향을 줌 ⇒ 경천사지10층석탑
-원에서 만들어진 수시력, 화약 등 도입되어 고려 과학 발전에 기여
-『농상집요』 등 농서가 전래되어 농업 발전의 토대가 됨: 농사직설 등에 영향 강남에서 유행하던 이앙법 및 목면이 전래되어 삼남지방 일부에서 시행 재배됨
11강 3차시
-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원 간섭기 임에도 불구하고 반원개혁정치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결국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 실패와 신돈의 개혁정치 실패 공민왕의 죽음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촉진 시키게 됨].
-1352년 즉위 2년째, 변발과 호복 금지
-예의추정도감 설치
<관제 개혁>
-원 순제 연호 지정(1341~1368)정지 -> 원의 종속에서 벗어났음을 의미
-반원 개혁교서 반포
:정치체제의 정비,부원세력의 경제적 기반 해체,민생안정책,군사체제의 정비 등
-정치체제의 정비: 정방의 혁파,관제개혁 단행 ->문종 때 구제로 환원
-문종 때의 옛 제도로 환원시킨다는 원칙으로 중서문하성,상서성과 중추원, 이부 병부 등의 6부를 주축으로 함
<부원세력의 숙청>
-1356년(공민왕5) 기철 등 부원세력의 숙청 시작
-재추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이 자리에 참여한 기철, 권겸 등을 주살 군사를 동원하여 노책과 그 당여를 모두 주살함 ->주살된 인원 25명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숙청
※기철: 빠엔부카, 여동생 원나라 순제의 2황후, 태자 아이유시리다라 출생 : 정동행성 참지정사, 기철 일족은 교만하고 포악, 토지 탈점 등 불법행위
※권겸: 충숙왕 원나라 시종, 공민왕 1년 원나라에 딸을 황태자에 납비, 태부감태감
※노책: 충정왕 원나라 시종, 공민왕 4년 딸 원나라 태자비, 집현전학사 임명
-반원개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세력 제거
<1356년(공민왕 5) 정동행성[정동행중서성: 일본 원정 전방사령부] 이문소 혁파>
-1280년(충렬왕 6), 1283년, 1285년, 정동[일본 정벌]+행중서성[중서성 지방파견기관]
-초창기 의례기구, 점차 내정간섭기구, 입성책동[고려, 원편입]의 도구로 활용
-승상: 고려왕, 관리: 고려인
- 이문소: 정동행성의 사법기구[범죄를 다스리는 임무]로 출발, 점차 부원세력 규합 및 대변하는 권력기구로 변질
: 부원세력을 옹호하여 백성과 토지의 침탈을 방조, 이를 비판하거나 다스리려는 지방 관을 불법적으로 투옥, 압박
- 충목왕대 정치도감 설치하여 남의 전토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한 기삼만을 투옥하였는 데, 이문소가 개입하여 30여 명의 정치도감관을 투옥하면서 정치도감 2년만에 폐지
-공민왕 즉위 당시 이문소 관리들의 횡포와 전권이 더욱 심화 -> 원 세력을 배격하는 조처로 정동행성 이문소가 혁파의 대상이 되어 폐지(원 세력을 배격하는 조치로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의 대상으로 삼아서 제거를 하게 됨.)
<쌍성총관부 수복>
-쌍성총관부:[화주(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관부]
-고정 45년(1258) 용진현 사람 조휘와 정주 사람 탁청이 고려 지방관을 죽이 고 몽고에 항복함
-몽고는 총관부 설치,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로 임명, 이후 세습 통치
공민왕 5년째 인당과 유인우이라는 사람을 서북면과 동북면에 파견하여 실지회복
-1356년 추밀원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에 임명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공략
-총관 조소생, 천호 탁도경 항거,
-천호 이자춘의 협력으로 탈환 → 쌍성총관부 폐지, 화주목 설치 -> 이자춘: 동북면병마사 임명, 그의 아들 이성계의 세력기반을 키우는 시점이 됨.
<반원정책의 후퇴>
-즉위 8년과 10년째,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잦은 침탈 -> 민생문 제 악화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 이북 초토화, 왜구 침탈로 삼남지역 노략질 등
-전시체제 지속되면서 반원노선 유보 → 원과의 적대관계로 이중의 적 상대할 수 없는 상황
-원에 우호적 자세, 정동행성 복구, 1356년(공민왕 5) 개편된 관제 다시 복귀
-최영, 이성계 등 무장들의 활약으로 정권 안정화
[다시 한번 개혁정치를 펼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한편으로는 최영과 이성계라고 하는 무장 세력에 흥기를 제공하게 됩니다.]
- 공민왕의 왕권강화 정책을 설명할 수 있다.
<신돈의 등용>
-1365년(공민왕 14) 5월 신돈을 등용하고 인사개편 단행
-최영 등 무장세력을 비롯한 많은 세족·권문들을 좌천, 유배
-왕권과 다름없을 정도로 권력을 집중시켜 왕권강화를 꾀하면서 개혁정치 추진
<내재추제의 신설>
-선발된 일부 재신과 추밀이 궁내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는 변칙적인 제도
-도평의사사[도당]의 권한 축소, 왕권 강화 -> 개혁에 소극적인 기득권 세력 견제, 공민왕 측근 중심의 정치 운영 도모로 왕권 강화
-- 하지만, 1371년 이후 내재추제의 부정과 도평의사사 강화 쪽으로 정책 우회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사회경제적인 개혁 추진
-세족·권문들이 공·사전을 탈점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대규모 농장을 경영함으로써 민심의 이반과 국가 재정 약화 등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설치
-기한을 정하여 권세가 스스로 이를 바로잡도록 강력히 요구
-- 천인 가운데 양인이었음을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속량한다는 방침도 천명 -> 변정사업은 민의 지지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룸(노비안검을 떠올리는 정책)
-민생문제와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는 의의가 있음
-변정의 대상자인 이인임, 이춘부 등이 개혁의 추진자로 관여하고 있어 일정한 한계 내포
(권문세족을 내몰지 않고 그들에 의해서 권문세력의 탈점을 개혁을 한다라고 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라는 뜻)
<성균관 중영>
-1367년(공민왕 16) 숭문관 옛터에 국학을 중건하자는 임박의 건의로 교육개혁 추진
-국학 진흥책 : 학교 건물 중건, 학생수 증가, 오경사서재로 교육과정 편성 등 경학교육 강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고 국왕 세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 함)
-이색·김구용·정몽주 등이 신돈정권에 참여 → 국학중흥책이 매개
-성리학의 전래·확산 및 신진사류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
-이제현과 이색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좌주·문생과 동년 관계를 통해 결집
-교육개혁의 추진을 통해 자신의 지지세력 확보, 권력기반 확대
<관료체계 정비>
-산관[관리가 될 자격은 있으나 실직이 없는 사람]에 대한 통제 : 군공에 대한 보상으로 첨설직이 신설되는 등 관료의 양적 증대
-관료의 증대 → 역 부담층의 감소, 국가 지배력 손상
-산관을 서울에 올라와 숙위하게 하여 이들을 통제하고 관료사회의 기강을 확립
-순자격제의 실시 : 관료 승진 시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무 년한을 기준으로 삼음 → 군공 중심의 능력 평가를 지양하고 인사과정의 비리를 막고자 한 조치
-1371년(공민왕 20), 신돈 제거 이후 개혁정치 중단, 1374년 시해됨
(23년간의 공민왕 재위 기간이 끝났을 뿐만이 아니고 원지배라고 하는 백여년에 걸친 어떤 질곡의 역사를 벗어나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어느정도의 설공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무위로 끝나게 되고 권문세족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우리가 역사에서 개혁정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또 개혁을 하기위해서는 자기 측근세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들중의 일부는 항상 반 개혁적인 인사가 측근의 일부를 차지한다는 모순이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고 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항상 개혁의 본질적인 문제인데 이것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면 결국은 민의 동의, 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족은 몰락이 되는 역사의 어떤 순환의 고리를 알 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 파랑색 강조한 부분이 왜 이렇게 오늘날
상황과 비슷하여 왜 이렇게 가슴에 후벼 파는가!!
저때는 공민왕이 열심히 노력이라도 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저런 대통령도 없다 ㅜㅜ
공민왕 내가 한국사에서 제일 좋아하는 왕
실의만 안 당했다면...
참 어렵네 측근 세력도 키워야 하고 반발 세력도 잠 재울 때(적절한 압박이 필요하고)
나는 근데 저렇게 한것만 해도 진짜 존경스럽더라
권문세족들이랑 합세해서 원나라에 충성하면 국왕으로 부귀영화 누릴텐데
썩은 나라를 개혁하려고 인생을 바쳤던 분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지도자다
몽골의 지배도 일제의 지배 못지 않게 가혹했었던... 그 아리따운 어린 공녀들과 진귀한 공물들을 빼앗아간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게요! 몽골 문화재 불태운 것만 생각해도
저때당시 얘들이 미개해서 그런지 서양 문화도 파괴시키고 있는 모저리 다 불태우고 부수고
물론 고려 뿐만 아니라 몽골의 학정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까지도 미쳤지만, 그들의 역사적 과오를 지금의 몽골 사람 개개인에 씌워 적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 오늘 몽골인 한테는 적용 안 시켰음 ㅋㅋ 저때 당시로 바꿔야 겠다 ㅋㅋ
오해 여지가 있네요
몽골은 유럽에서 악마 라 불릴정도로 치를 떨었다고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