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훌륭한 음악은 그걸 듣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 작용을 하죠. 연주회가 끝난 뒤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그 순간이 내면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체코 필하모닉을(이하 체코필) 이끄는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가 한국 공연을 앞두고 "전 세계의 몇 안 되는 자신만의 정체성, 음색, 음악성을 지닌 유서깊은 악단입니다. 이러한 점이 체코필의 남다른 점"이라며 "단원들은 매우 신중하고 음악적 전통을 꼭 간직하고 싶어하죠"라고 말했다.
체코필 단원들은 비치코프를 '대디(아빠)'라고 부른다. 전임 상임지휘자였던 이르지 벨로흘라베크가 2017년 타계하고 슬픔에 빠져 있던 단원들은 비치코프가 이끈 공연에 감동을 받았고, 이후 그를 찾아가 "우리의 대디가 돼 달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비치코프는 단원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상임지휘자에 올랐다.
체코필은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5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체코의 국민 작곡가인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의 사육제 서곡,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을 연주한다. 2017년 이후 6년 만의 공연이며, 비치코프가 한국을 찾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한국은 처음이지만 체코필은 지난 4월 조성진과 감명 깊은 연주를 함께 했어요. 조성진은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음악적 파트너였어요. 그와 함께한 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한국은 음식이 유명하잖아요. 서양에서 현지화된 음식이 아닌 진짜 한국음식을 먹어볼 수 있어서 기대하고 있어요"라고 전했다.
이어 "지난 몇 십여 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한국인 클래식 음악가들이 늘어났어요. 한국인 음악가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찾을 수 없다고 봐야 해요. 이는 내가 자라온 것과는 다른 문화를 뼛속 깊이 받아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라고 덧붙엿다.
127년 역사의 체코필은 드보르자크가 1896년 1월 첫 연주회를 지휘하며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이번 내한에서는 일본인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가 협주곡을 들려준다. 2017년 스위스 클라라 하스킬 국제 콩쿠르 우승한 후지타 마오는 일본의 조성진으로 불리고 있다.
비치코프는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은 정말 완벽한 걸작인데, 체코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선 이상할 정도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게 이해하기 어려워요. 브람스와 베토벤을 합친 듯하면서도 드보르자크의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비치코프는 1952년 러시아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레닌그라드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73년 21살에 라흐마니노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지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983년에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1985년 베를린 필하모닉과 호흡을 맞춘 그는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후 주로 유럽에서 활동을 했으며, 2018년부터 동유럽 대표 오케스트라 체코필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지휘자는 조용한 몸짓만으로 듣고자 하는 음악을 불러낼 수 있어야 해요. 템포·타이밍·정신 등 매우 기본적인 사항이 명확해야 하고, 그 몸짓은 음악에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음악은 늘 지휘자의 손안에 있어요. 지휘만 보고도 어떤 곡을 지휘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도 있죠. 지휘는 결국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에요."
비치코프는 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다. 성명을 통해 "악에 직면했을 때 침묵을 고수하는 것은 결국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지난해 3월에는 체코 바츨라프 광장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해 자선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지 정치가 아니에요. 당신이 만약 길을 가다가 누가 봐도 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얻어맞고 있는 것을 봤다면 최소한 경찰에 신고라도 하겠죠. 저는 그저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인간답게 행동했을 뿐이에요. 때로는 침묵이 악마일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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