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és Bonifacio)는 1863년 11월 30일 스페인 치하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Maynila)의 톤도(Tondo)에서 빈민층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사상가 호세 리살(José Rizal)의 <놀리 메 탕헤레(Noli Me Tángere)> 등을 비롯한 각종 서적을 읽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리살을 도와 비밀결사 라 리가 필리피나(La Liga Filipina)의 설립에 가담하여 스페인 당국의 폭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리살이 스페인 당국에 총살당한 일을 기점으로 1892년 7월 7일 무장독립단체 카티푸난(Katipunan)을 결성하여 무장봉기를 시작했습니다. 혁명의 불씨는 다른 지역까지 번져나가 카티푸난은 군세를 갖추지만 빈약한 무장과 숙련이 덜 된 군사훈련으로 스페인 당국에 승리를 하나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오른팔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를 비롯한 중산층 출신들이 그의 지도력을 의심하고 지원을 보내지 않으면서 카티푸난 안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그와 아기날도는 서로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1897년 3월 22일 아기날도의 본거지인 카비테성(Lalawigan ng Kabite)에서 대통령 선거를 열어 새 지도자를 선출하기로 합니다.
결과는 아기날도가 선거에서 이겨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보니파시오 본인은 그 자리에서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 했지만 대통령이 된 아기날도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와 그의 동생, 측근들을 잡아들여 그 해 5월 10일 마라곤돈(Maragondon)으로 끌고 가 총살하도록 합니다.
총살된 그와 그의 동생, 측근들의 시신은 그의 아내가 수습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고 그가 죽은 후로도 아기날도를 필두로 한 혁명의 주체들은 계속 내분을 일으키며 미군이 당도할 때까지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필리핀에서는 그가 카티푸난을 세워 무장봉기를 시작한 공로를 인정해 비공식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의 생일인 11월 30일을 공휴일로 기념해서 매년마다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