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 7년[9월 뒤 중흥원년(重興元年) 원 지원 22년] 춘정월 6일, 원의 오마아(烏馬兒)가 만겁과 보래산(普頼山) 등처를 침범하였고, 관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12일, 적들이 침범하여 가림(嘉林), 무녕(武寕), 동안(東岸)을 점령하였으며, 우리 군이 먹으로 '殺韃(달단놈들을 죽이자)'이라는 두 자를 팔에다 새기자 크게 노하여 심히 많은 이들을 죽였다. 드디어 동보두(東步頭)에 이르자 큰 깃발을 세웠다.
황제는 사인으로 적의 허실을 엿보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였다. 지후국수(祗候局首) 두극종(杜克終)이 바삐 나아가 왈, "신이 비천하고 재능이 없으나 청컨대 나가자 하나이다."
황제가 기뻐하여 왈, "어찌 소금수레에 이런 뛰어난 말이 있는 줄 알았겠는가!"
봉서(奉書)를 보내어 행성(行城)에 청하였다.
오마아가 물어 왈, "국왕이 무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殺韃'자를 먹으로 새겼으니 천병(天兵)들을 우롱한 것이며, 그 화는 크리라."
극종이 응하여 왈, "집강아지가 사람에게 짖으면 그는 주인이 아니오. 충분(忠憤)의 마음에 저 스스로 귀를 찌르는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를 알지 못하셨소. 소인은 무릇 근신(近臣)일진대, 어찌 홀로 일함이 없겠소."
이에 그 팔을 걷어붙여 보였다. 마아 왈, "대군이 멀리 왔는데 그대의 나라는 어찌 창을 뒤집고 함께 상견하여 오지 않고 도리어 이에 항명하는가. 사마귀가 팔로 수레를 가로막는 것이거늘, 장차 어찌할 셈이냐?"
극종 왈, "현장(賢将)은 한신(韓信)이 연(燕)을 평정했을 때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국경 경계에 군을 주둔시켜 먼저 서신을 전하여 통호(通好)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화를 부를 것이오. 지금 상태가 급박하여 이른바 짐승도 궁하면 할퀴고 새도 궁하면 쪼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겠소."
마아 왈, "대군은 점성을 칠 것이니 길을 빌려다오, 국왕이 만약 상견하러 온다면 곧 경계 안이 편안해지고 추호도 범하지 않을 것이니라. 만약 혹시라도 잘못을 고집하는즉 순식간에 산천이 장차 평지가 되고 군신(君臣)이 장차 썩은 풀이 되리라."
극종은 이미 돌아갔고, 마아가 제장(諸将)에 일러 왈, "이 사람은 위압을 당할 때에도 태연하고 기백있게 말하였는데, 주인이 척(跖)이면 내가 요(堯)여도 아첨하지 않을 것이니, 다만 가로되 "집개가 사람에게 짖었다"고 하였다. 응대를 잘한 것이로다. 가히 임금의 명을 욕보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노라. 저 나라는 사람이 있으니 쉬이 도모하지 못하리로다."
사인을 보내어 쫓아갔으나 뒤를 밟지 못하였다.
13일 묘시(卯時), 극종이 스스로 원에서 회군하였다. 적들이 따라왔으나, 관군과 서로 대적하였다.
28일, 흥도왕은 상상태사 광계에게 사도 원수의 군사를 예안(乂安)에서 막아달라고 요청하였다.
2월 갑진(甲辰) 초하루, 정국대왕 국강의 서자 상위(上位) 창헌후(彰憲侯) 건(鍵)과 요속(僚属) 여즉(黎崱)['土(토)'와 '力(력)'의 반절] 등이 가족을 이끌고 원에 투항하였다. 사도는 건 등을 연경으로 돌려보내었다. 양강토호(諒江土豪) 완세록(阮世祿), 완령(阮領) 등이 마륙채(麻六寨)를 쳤다. 흥도의 집종 완지로(阮地爐)는 건을 쏘아 죽였다. 즉은 건의 시체를 가지고 말에 올라탔으며, 밤에 수십 리를 숨어 달아나 언덕에 이르러 따뜻이 장례를 치렀다.
사람을 보내 안자공주(安姿公主)[성종의 끝누이동생]를 탈환에게 보내어 국난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보의왕(保義王) 진평중(陳平仲)[왕은 여대행(黎大行)의 후손으로 서보공주(瑞宝公主)의 여섯째 남편이었으며 조부는 태종(太宗)에게 당시 사성을 받았다]은 재차 다막주(拖幙洲)[즉 천막(天幕)이자 지금의 만주주(幔幬洲)이다]에서 적들과 함께 싸우다 죽었다.
이때 왕은 사로잡혔으나 먹기를 거부하였고, 적들이 국사(國事)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대답치 아니하였는데, 적들 왈, "북왕(北王)이 되고 싶느냐?"
왕이 소리 높여 왈, "차라리 남귀(南鬼)가 되는 것이 북왕이 되는 것보다 낫도다."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적병들의 세력에 밀려 두 황제는 거느리고 있던 작은 배에 숨어 삼치원(三峙元)으로 행차하였는데, 명하여 어박(御舶)을 끌어 옥산(玉山)을 나가 적정(賊情)의 의심을 피하였다.
이때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였는데, 국준은 본디 기이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고, 또 안생왕(安生王)은 일찍이 불화가 있으므로 시기와 의심이 매우 많았다. 국준이 호종(扈從)하면서 손에 쥐고 있는 나무지팡이 끝에는 순(錞)이 있었다.[발음은 '순(純)'으로 형태는 유설(有舌)한 종과 같았다] 사람들 모두가 곁눈질하여 흘겨보았다. 국준은 그 순을 뽑아 던졌으며, 단지 빈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녔고, 또 모든 일이 이와 유사함이 많았다.
사신 오사련 왈, "대신들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곳에 있으면 반드시 성의를 다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밝게 선처(善處)하여 마땅히 구사(九四)를 따라 그러한 뒤 능히 명예를 지켜 공과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반드시 닥치리라. 당(唐)의 곽자의(郭子儀), 진(陳)의 진국준이 그러했었도다."
3월 갑술(甲戌) 초하루, 두 황제가 배를 버리고 수주(水注)를 좇아가 이르렀다. 배를 가지고 남조강(南趙江)[즉 수당현(水棠縣)]을 나오고 대방해(大旁海)를 넘어 청화(清化)에 거둥하였다.
상위 문소후(文昭侯) 롱(弄)은 탈환에게 투항하였다. 이윽고 소국왕(昭國王) 익직(益稷)과 범거지(范巨地), 여연(黎演), 정융(鄭隆) 등이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원에 투항하였다.
이전에 익직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 태종이 꿈에서 세 눈이 달린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하늘을 좇아 태종에 하언하여 왈, "신하가 상제되어 꾸짖는바, 황제에 원탁하고 그 뒤 북녘으로 돌아가노라."
익직이 태어날 무렵, 이마 가운데에 무늬가 있었는데, 은연에 눈 모양이 보기에는 꿈에서 나온 사람과 닮은 듯하였다. 나이 열다섯에는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서사(書史)와 모든 기술에 통달하였고, 몰래 탈적(奪嫡)에 마음을 두었다. 일찍부터 사심을 품고 운둔(雲屯) 상객(商客)들에게 글을 부쳐 원 군사가 남녘으로 내려오는 것을 빌었다. 원인들이 쳐들어옴에 이르자, 마침내 그 나라에 투항하고자 함이 있었다. 원은 안남국왕에 봉해주었다. 원이 패함에 미치자, 코피를 쏟으며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북녘 땅에서 졸하였다.
사도 원수는 병사 50만을 거느리고 운남(雲南)에서부터 노과(老檛)를 지나 곧 점성에 이르렀으며, 원인들과 만나 오리주(烏里州)에서 환(驩)과 애(愛)를 약탈하고 서결(西結)에 진주하여 3년 안에 우리나라를 평정할 것을 기약하였다.
황제가 군신(群臣)과 의논하여 왈, "적들은 심히 많은 해에 원행(遠行)하며 치중(輜重)을 만 리나 끌고 왔으니 필연코 피폐해져 있을 것이로다. 지칠 때까지 편안하게 기다렸다가 먼저 그 군기를 빼앗아 반드시 깨뜨리도록 하여라."
여름 4월, 황명으로 소성왕(昭成王)[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회문후 국찬, 장군 완괴(阮蒯) 등이 재빠른 병사들을 이끌고 서결보두(西結步頭)에서 적들을 맞이하였다.
관군은 원인들과 함자관(𬺍子關)에서 교전하였다. 제군들은 다 있었다. 오직 소문왕(昭文王) 일율(日燏)의 군대에 송인(宋人)들이 있어 송옷을 입고 활을 가지고 싸웠다. 상황께서 제군들이 혹여나 분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인으로 타일러 왈, "이것은 소문의 달(韃)이도다, 마땅히 분간하여라." 송과 달은 목소리와 의복이 서로 닮았기 때문에 원인들이 보고 모두 놀라서 가로되 송인들이 와서 돕고 있다고 하였고, 그리하여 패배하였다. 이전에 송은 망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우리에 돌아왔는데, 일율이 받아들였고 조충(趙忠)이라는 자가 가장(家将)으로 있었다. 고로 원을 패배시킨 공은 일율이 많이 차지하였다.
5월 3일, 두 황제께서는 장안부(長安府)에서 적들을 무찌르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귀를 베었다.
7일, 첩보에 이르길 원의 사도가 스스로 청화에 온다고 하였다.
10일, 적의 은신처에서부터 어영(御營)으로 도망온 이가 아뢰되, "상상 광계, 회문후 국찬과 진총(陳聰), 완가랍(阮可臘)과 그의 아우 완전(阮傳)은 여러 길로 백성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경성(京城), 장양(章陽) 등처에서 적들을 무찌르고 있사옵니다. 적군은 대패하였사옵니다. 태자 탈환, 평장 아랄 등은 노강을 달려가고 있사옵니다."라고 하였다.
15일, 두 황제는 용흥(龍興)의 제릉(諸陵)을 배알하였다.
17일, 사도와 오마아는 바다에서부터 다시 한번 천막강(天幕江)을 침범하러 왔는데, 경사(京師)에서 회병하여 서로를 돕고자 하였다.
유병(游兵)들은 부녕현(扶寕縣)에 이르렀고, 본현의 보도자(輔導子)인 하특(何特)은 치산(峙山) 위에서 고수하였다. 적들은 거타동(巨陀洞)에 진을 쳤다. 특은 대나무를 엮어 큰 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이슥한 밤에 끌며 들락날락하였다. 또 커다란 나무를 뚫어 큰 화살들을 가지고 그 가운데 동봉함으로 하여금 적들이 쏘는 힘으로 꿰뚫은 것으로 의심하게 하였다. 적들은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여 두려워하였다. 우리 군은 드디어 탈환하고 쳐부쉈다. 특은 쫓아가서 싸우다 아랍(阿臘)에 이르렀고, 부교(浮橋)를 놓고 강을 건너 격렬히 싸우다 죽었다. 아우 창은 적들에게 잡혀 적들의 기치(旗幟)와 의복을 훔쳐 얻은 채로 도망해 돌아와 그것을 올려 쓰기를 청하였고, 그 깃발을 적군의 것으로 위장하여 적영(賊營)으로 나아갔다. 적들은 예측하지 못하였기에 우리 군이 드디어 크게 쳐부술 수 있었다.
20일, 두 황제는 대망보(大忙步)에 나아가 머물렀다. 원 총관(總管) 장현(張顯)이 투항하였다. 이날 서결에서 패한 적들을 심히 많이 살상하였는데, 원수 사도의 목을 베었다. 밤중에 오마아는 청화강 입구로 달아났고, 두 황제가 쫓았으나 뒤를 밟지 못하였으며, 그 남은 잔당 5만여 명을 사로잡아 돌려보냈는데, 오마아는 겨우 한 배에 타서 바다를 벗어났다.
흥도왕은 또 탈환, 이항(李恒)과 만겁에서 싸웠고, 패하여 심히 많은 이들이 익사하였다. 이항은 탈환의 호위병들을 데리고 사명(思明)으로 물러났다. 우리 군은 독화살로 항의 왼쪽 무릎을 쏘아 맞혀 죽였다. 비장(裨将) 이관(李瓘)은 남은 졸병 5만 명을 모아 탈환을 동기(銅噐)에 숨겼고, 그 가운데 북녘으로 달아났다. 사명에 이르자 흥무왕이 쫓아 독화살로 이관을 쏘아 맞혀 죽였다. 원병들은 대패하였다.
황제는 사도의 수급을 보고는 측연하여 왈, "인신된 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되도다."
어의를 벗고는 유사에게 장사지내라고 명하였으나 그 머리를 기름에 담가 전시하여 경계로 삼았는데, 사도는 3년간 길을 빌려서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신 오사련 왈, "오호라! 황제의 이 말씀은 참으로 제왕의 말씀이로다! 그 대의를 밝힘으로 하여금 만세(萬世)의 인신(人臣)이 충군(忠君)하여 죽는 일의 영예를 앎에 있어 비록 죽을 수는 있어도 썩을 수는 없으니, 그 관계하는 바 역시 크리라. 하물며 또 옷을 벗음으로 하여금 거두어 장사지내랴. 그와 같이 능히 사기를 떨쳐 강적들을 무찌르는도다. 당연하도다!"
상장(上将) 광계가 시를 지어 왈, "奪矟章陽度擒胡𬺍子關太平須𦤶力萬古此江山(장양도에서 창을 빼앗았도다. 함자관에서 오랑캐를 사로잡았도다. 태평을 모름지기 힘을 다하여 이루었도다. 만고함이 이 강산에 있으리로다.)"
중품(中品) 봉어(奉御) 등유지(鄧㬰之)에게 명하여 점성으로 보내 재신(宰臣) 파루(婆漏), 계나련(那連) 등 30명을 환국케 하였는데, 사도를 좇았기 때문에 잡혔도다.
가을 8월, 좌복야(左僕射) 유강개(劉剛介)에게 명하여 공신(功臣)들을 다르게 선봉(宣封)하였고, 항복한 적놈들의 죄를 다스렸다.
[출처]
1) http://www.nomfoundation.org/nom-project/history-of-greater-vietnam/Fulltext/40-Nhan-Tong-Hoang-De?uiLang=vn
2) https://bienniensu.com/tran-nhan-tong/
3) https://zh.wikisource.org/wiki/%E5%A4%A7%E8%B6%8A%E5%8F%B2%E8%A8%98%E5%85%A8%E6%9B%B8/%E6%9C%AC%E7%B4%80%E5%8D%B7%E4%B9%8B%E4%BA%94#%E4%BB%81%E5%AE%97%E7%9A%87%E5%B8%9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