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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와 삼성,NC 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장문주의)

신라민국 책략가

1951년 미국 내셔널 리그의 페넌트 레이스는 싱겁게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8월11일 현재 뉴욕의 브루클린 다저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前身)는 뉴욕 자이언츠(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前身)를 13.5 게임차로 리드하고 있었습니다. 자이언츠는 시즌 개막 직후 11連敗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이언츠는 8월에 16連勝을 하면서 다저스를 추격하기 시작해 마지막 게임에서 다저스와 승률이 같아졌습니다. 당시엔 디비전도 플레이 오프도 없어 내셔널 리그 승자가 바로 아메리칸 리그 승자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었습니다.
  
   승률이 같은 두 팀을 위해 제도에도 없던 3連戰의 플레이 오프가 열렸습니다. 1차전은 자이언츠가 3 대 1로 先勝. 보비 톰슨 선수가 홈런을 쳤습니다. 2차전은 다저스가 10 대 0으로 승리하여 결승 3차전으로 넘어갔습니다. 자이언츠의 球場인 폴로 그라운드에서 9회 초를 마쳤을 때 다저스가 4 대 1로 이기고 있었습니다. 9회 말 자이언츠는 1루타, 1루타, 2루타로 1점을 얻고 「1死에 2, 3루」가 되었습니다. 다저스 감독 찰리 드레센은 돈 뉴캄 투수를 물리고 랄프 브랑카 투수를 내세웠습니다. 톰슨이 打席으로 들어갈 때 3루 쪽에 있던 자이언츠의 감독 리오 두로셔는 톰슨의 등을 향해 『치려면 지금이야』라고 말했습니다. 톰슨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기본을 지켜라. 기다리면서 지켜봐. 너무 걱정하지 마. 집착하라, 공격적으로 생각하라, 문제는 의지력이다. 기다려라, 기다려라』
  
   제1구는 정면으로 들어온 직구로 스트라이크. 제2구는 몸 쪽으로 들어온 약간 높은 공이었습니다. 톰슨의 방망이가 회전했고 공은 레프트 필드 스탠드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315피트를 겨우 넘겨 관중석의 맨 앞줄에 떨어지는 3점 홈런. 관중들과 선수들은 잠시 멍 하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터진 환호, 그제야 사람들은 5 대 4로 자이언츠가 기적의 逆轉勝을 했을 뿐 아니라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차지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자이언츠는 월드 시리즈에선 양키스한테 4게임 대 2게임으로 졌습니다.
  
  
   지난 10월3일은 이 유명한 홈런 50주년이었습니다. 미국 언론은 보비 톰슨과 그에게 홈런을 허용한 랄프 브랑카 투수의 근황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77세의 톰슨은 종이 파는 일을 하다 은퇴했고, 75세의 브랑카는 보험 외판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서로 친밀한 사이로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브랑카는 지금 뉴욕 메츠의 감독인 보비 발렌틴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올 봄에 월 스트리트 저널紙는 폭로 기사를 실었습니다. 당시 뉴욕 자이언츠가 상대 팀의 사인을 조직적으로, 지속적으로 훔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이언츠가 폴로 그라운드에서 경기할 때는 센터 필드 스탠드에 박아둔 첩자가 망원경으로 상대 팀의 포수가 투수에게 보내는 사인을 훔쳐보고 불펜(투수 연습장)으로 연락했다고 합니다. 부저를 한 번 누르면 직구, 두 번 누르면 변화구란 신호로 말입니다.
  
   그런 신호를 받은 불펜의 중계자는 공을 집어서 자이언츠 팀 타자를 향하여 손을 번쩍 들어보입니다. 이것은 직구란 말입니다. 불펜의 중계자가 공을 던져 올리면 이것은 변화구란 뜻입니다.
  
   톰슨 자신은 그 유명한 홈런을 칠 때 그런 신호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브랑카는 그 惡夢의 投球 3년 뒤 이런 사인 훔치기에 대해 알았지만 친구 사이가 된 톰슨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브랑카는 회고했습니다.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울어 봐야 무엇하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인을 훔쳤다고 다 홈런을 치는 것도 아닌 거고요. 만약 톰슨이 사인을 훔쳐서 그 홈런을 쳤다면 그는 거짓말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할 거고요』
  
   브랑카가 톰슨에게 역사적인 홈런을 허용하고 혼자서 쓸쓸히 球場을 나오니 戀人 앤 멀비가 자동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차에는 포덤 대학교 학장이자 예수회 신부인 패트 롤리가 동승했다고 합니다. 브랑카가 말했습니다.
  
  
   『여기 웬 일입니까?』
  
   신부가 말했습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랄프, 하느님께서 당신을 택한 것이야.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그런 십자가를 지고 견딜 만큼 강인하다고 판단하신 거지』
  
   그 뒤의 인생 역정을 보면 이 신부의 말이 的中한 것 같기도 합니다. 球場에서의 敗者가 인생에선 勝者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야구가 축구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고 복잡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에선 종료 시간 5분 전에 어느 팀이 4 대 1로 이기고 있다면 이를 뒤집는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야구에선 가능합니다. 逆轉의 의외성과 심도가 축구보다 큰 것이 야구입니다. 축구가 아날로그라면 야구는 디지털적이라고 할까요.
  
   야구에는 傳說과 神話와 抒情과 페이소스, 그리고 꿈이 있습니다. 이번 월드 시리즈의 7차전 마지막 게임 같은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이요 인생 축도판입니다. 때늦은 후회, 名手의 失手, 그리고 事必歸正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김병현의 그 바보 같은 失投도 이 시리즈를, 그리고 마지막 게임의 역전승을 더욱 위대하게 보이도록 만들려는 神의 설계가 아니었겠습니까.
  
   야구는 눈앞에 전개되는 운동량과 속도감, 그리고 迫眞感에서는 축구보다 靜的이지만 인간의 두뇌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갈등, 계산, 번민, 흥분에선 그 어떤 경기보다도 깊고 진한 맛이 있습니다. 야구는 보이는 부분보다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재미 있습니다. 야구는 詩的이고 축구는 散文的이라고 할까요?

  
   저는 1996~1997년 사이 미국 보스턴 근교의 하버드 대학에서 1년 간 연수를 했는데, 보스턴 레드삭스의 球場 펜 웨이 파크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 球場은 시카고 컵스의 리그리 필드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球場이며 가장 분위기가 좋은 곳으로 꼽힙니다. 작지만 야구의 순수한 맛이 느껴지는 곳이지요.
  
   전설적인 강타자 베이브 루스는 원래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투수였는데, 뉴욕 양키스로 송출된 경우입니다. 이 대실수를 보스턴 사람들은 「루스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뉴욕 양키스에게 당하기만 하는 이유를 이 저주에 돌립니다. 다분히 숙명적인 체념이지요.
  
   1978년이 좋은 경우입니다. 이 해 보스턴 레드삭스는 7월 중순에 1위와는 10게임차, 3위인 양키스와는 14.5게임차를 두었습니다. 7월 하순부터 시작하여 양키스는 희대의 역전극을 준비합니다. 나머지 73게임 중 52게임을 이겨 정규 시즌이 끝났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와 동률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단 한 게임으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펜 웨이 파크에서 열린 이 게임에서 7회까지 2대 0으로 리드했습니다. 양키스의 공격이 시작된 7회 초 2死에 주자를 두 사람 두고 버키 덴트가 들어섰습니다. 그는 시즌 중 홈런을 다섯 개밖에 치지 못한 약타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휘두른 방망이는 플라이 볼을 레프트 쪽으로 날렸습니다. 다른 球場 같으면 외야 플라이 볼로 잡힐 거리였지만 펜 웨이 파크의 레프트는 아주 짧습니다. 3점 홈런! 양키스가 3 대 2로 역전. 레드삭스는 양키스를 5 대 4로 따라잡습니다.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레드삭스는 2死에 3루 주자를 두고 강타자 야츠렘스키가 등장합니다. 내야 플라이.
  
   지금도 많은 보스턴 사람들은 버키 덴트란 이름만 들어도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이런 팬들에게 야구는 역사요, 생활이요, 고통입니다.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勝數를 기록한 시애틀 마리너즈를 꺾은 전통의 양키스를, 창단 4년 만의 신생 다이아몬드백스가 7차전까지 가는 死鬪를 벌인 끝에 누르고 우승했다는 것은 일종의 正義 구현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그 正義 구현은 영화에서처럼 一刀兩斷하듯 명쾌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처럼 복잡한 사연과 기복을 거친 끝에 힘들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역시 야구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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