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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59 형평성에 맞춰 조세를 거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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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4대 세종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농업은 급속도로 발달했다. 인분을 비롯한 각종 비료의 사용으로 땅의 비옥도가 높아지면서 논밭은 물론 산지까지 연작 상경이 가능해졌다. 

 

쌀의 품종 개량과 함께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모내기법이 시행되면서 변화된 농업 생산량을 반영하는 새 공법(貢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세종은 풍흉과 토지의 비옥도로 조세를 거두는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이란 제도를 신설하고 운용했다.

 

연등구등법은 그 해에 태풍이나 장마 등 날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달라지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조세를 거두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졌다.

 

1443년(세종25년)부터 풍흉의 정도를 상상년(上上年)부터 하하년(下下年)까지의 아홉 단계로 나누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이는 1444년(세종26년)에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풍작인 해에는 최고 등급인 상상년을 적용해 토지 1결당 20말을 징수했고, 여기서 한 단계 아래 등급으로 내려올 때마다 2말씩 적게 거두어 마지막 단계는 4말만 거두었다.

 

전분육등법은 토지의 비옥데 따라 등급을 여섯 단계로 나누어 조세를 차등적으로 징수한 제도다. 1444년(세종26년),전제상정소는 약 23.1cm의 주척(길이를 재는 자의 하나)을 기준으로 토지를 측량했는데, 토지의 등급에 따라 다른 길이의 자를 사용해 결(結)*의 실제 면적을 다르게 했다.

 

그 결과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등전에 올렸던 토지는 1~3등전으로 등급이 상향되고, 산에 조성된 토지는 ~56등전으로 하향되며 조세의 형평성이 맞춰졌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자 연분구등법과 전부구등법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과전법이 무너지고 지주전호제가 보편화되자 전국의 많은 토지가 일부 권력자에게 집중되었다.

 

그 결과 세금을 납부할 농민들이 토지에서 쫓겨나면서 국가는 조세를 제대로 걷지 못했다. 또한 국가 기강이 무너져 수확량을 매번 제대로 측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과세 기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관리들로 인해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은 제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결국 1635년(인조13년)에는 토지의 등급을 대부분 낮게 책정해 1결당 4~6말을 거두는 영정법으로 대체되면서, 형평성에 맞게 조세를 거두었던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은 사라졌다.

 

결: 세종 시기 1등전의 1결의 넓이는 9,859.7㎡(약 3천 평)

 

-좋은 제도는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 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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