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후금(청)의 천명제 누르하치 되시겠다
혹자는 일본이 진정한 승자가 아니냐고 묻겠지만
일본도 임진왜란 직후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서군의 이시다 미츠나리로 갈라져 내전을 벌였고
거기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이후 히데타다 등의 쇼군이 안정을 시킨 뒤에야
비로소 에도막부가 자리를 잡는 등 역시 나름의 우여곡절이 많았음
즉, 일본조차도 이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 이득을 바로 못써먹은 그런 실정이었음
하지만 누르하치와 그가 이끄는 건주여진은 임진왜란 전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여 명나라를 거꾸러뜨림
1583년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타크시, 할아버지 기오창가가 명나라의 실수로 죽게 되었고
이에 당시 명나라에서 요동으로 파견된 소위 '요동왕'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황제의 칙서와 말을 주어 위로하였음
누르하치는 이 밑천을 바탕으로 몇 년 동안 건주 통합 전쟁을 벌였고 1589년 건주여진을 통합함
건주여진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최대 원수, 해서여진과 대립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두가지 사건이 터지니 하나는 1591년, 요동왕 이성량이 해임되어 명나라의 북방지역 영향력이 붕 뜨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이었음
임진왜란으로 항상 여진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던 조선의 북방병이 신립을 따라 남하하게 되고
이후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명나라는 조승훈을 파견하는데 이 조승훈은 급하게 요동지역 병력을 차출해 조선을 지원했지만
이 병력들이 조승훈의 잘못된 판단으로 증발해버림
이렇듯 북방을 경계하던 두 축, 명나라와 조선의 경계가 한순간에 증발해버리자 누르하치는 때가 왔다고 판단,
마침 자신을 협박하러 온 해서여진에게 되려 선전포고를 하였음
누르하치의 건주 VS 해서여진 + 해서여진을 지원하는 몽골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 전투가 바로 1593년 구러산 전투였음
그 구러산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해서여진을 거꾸러뜨려 사실상 여진족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자신에게 반항하던 장백산부를 밟는 등 임진왜란으로 명과 조선이 바쁠 때 여진족 전체를 완전하게 소화시키기 시작함
정신없게 시작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보니 이미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명과 조선은 이를 곱게 지켜보지 않고 노골적인 견제에 들어갔음
그리고 1619년 명, 조선, 남은 친명파 여진이 힘을 모아 후금의 수도인 허투알라로 진격하기 시작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지만 누르하치는 대칸의 자리에만 올랐고 황제에 오른 적은 없죠ㅋㅋㅋ 고로 천명'제'가 아니라 천명'칸'이 맞는 이름이죠
칸이 맞기야 한데 뭐 이후에 태조 천명제로 받았으니 황제라고 해둡시다 ㅎㅎㅎ;;;;
사실 사후 '고황제(高皇帝)'로 추존되기야 했으니 황제라 불러도 틀린 건 아니죠ㅋ 근데 연호가 '천명'이기는 했어도 제호가 '천명제'였던 적은 없었던...
어부지리..
어부지리와 본인의 능력, 거기에 운까지 다 겹친 말 그대로 '천명' 이란 게 존재해서 누르하치를 점찍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
이런 천운이 홍카한테도 열렸으면 ㅠㅠㅠ 잡초단 추
어부지리라고해도 명나라와 조선 국력생각해보면 100만도안되는 인구가지고 그러려면 진짜 엄청난 능력이 있던거임ㅋㅋ
좋은 글
어부지리 핵꿀 누르하치 ㅋㅋㅋㅋ
조선에게 그저 빛이였던 '만력제'가 명나라 수명 갉아먹은 원인도 있음.
용장 지장이 아무리 날고길어도 천운을 타고난 운장한테는 못비비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희대에 트롤러라는게 학계 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