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월전쟁
중국, 베트남을 침공하다
1979년 2월 17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수비대가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였다.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중국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두 나라의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종료되었다.
중국은 오랫동안 베트남이 조공을 바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1969년 중소 국경 분쟁에서 소련을 지지했다.
1978년에는 중국이 후원하던 크메르루즈를 베트남이 점령하자 중국은 북쪽 국경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1979년 2월 15일, 중국 공산당 최고 기관의 중앙위원회 부주석인 덩샤오핑은 "동맹국 캄보디아 침공과 베트남 내의 중국계 화교 추방[베트남 측은 이를 부인]"을 이유로 '베트남에 대한 징벌적 군사행동'을 공식 발표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이어 2월 17일, 중월 국경 지대 전역에서 중화기 1,500문을 동원하여 포격을 가하고 10개 군 30만 명으로 베트남 국경을 침공했다.
베트남은 이 지역에 정규군 2개 사단 약 2만 명 정도와 민병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 지형에 익숙했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게다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둔 무기도 있었다.
결국 중국은 피해를 우려해 3월 6일 '징벌 완료'를 선언, 3월 16일까지 베트남 영토에서 철군시키려던 당초의 전쟁 목적은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양국은 1980년대 내내 치열한 국경 분쟁을 계속했다. 무력 충돌은 베트남이 캄보디아엣서 철수하기로 한 1989년에야 끝났다.
몽골,미국,중국..등등
은근 베트남이 강대국 잘막음
몰랐던 세계사추
졸쎄 안에서는
몰랐던 세계사추
베트남 은근 씨다니까
몽골,미국,중국..등등
은근 베트남이 강대국 잘막음
졸쎄 안에서는
베트남 특 = 밖에선 몰라도 안에선 쌤
아프가니스탄도 비슷?
러시아도 그렇지 않나 밖보다 안이
1975 남베트남 멸망 직후, 사이공 주재 한국
외교관 15명과 현지체류인 200여명은
월맹에 의해 고립된다.
이중 중정소속 주월공사 이대용 예비역 준장은 현지에 남아 남은 주재원과 한국 교민을
당시 주한대사관에 모은 후 프랑스 국기로 달고 식량 쌀,숯,소금을 6개월 분을 사서 숨어지내다가 월맹군에 발각되어, 이대용 공사,경찰
담당 서병호 총경, 안희완 영사 3명은 치화
형무소에 수감된다.북한 공작원의 지속적인
회유에도 그들은 끝까지 버티다가,한국에 그들의 소재가 파악되었고, 5년간 베트남에
머물러야 했다. 나머지 교민과 하급 주재원은
베트남의 배급으로 버티다가 한두명씩 석방,추방듸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당시 주월 대사 전 해참총장 김영관대사는
공직에서 물러나고, 이대용 공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살하겠다. 대신 학비만 유족에
지급 해달라는 유서를 남긴다. 근데 중정소속이던 일급비밀 요원을 북에 보내면 큰일을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는 물밑협상을 진행한다.
북측에서 원한 인물은 박정희의 고향 형인
황태성, 김일성 주의자 신영복이었고 그들을
석방 시키려는 노력은 10.26 과 북한과 베트남의 관계 악화로 협상 중단이 되었다.
북한과 베트남은 같은 공산주의 친구였으나,
캄보디아 침공시 캄보디아를 지지한 중국을
북한도 지지하여 북한과 베트남은 사이가 벌어진다. 베트남은 이 사태로 북한을 엿 먹이기 위해 한국 포로 전원을 석방시켜 1980년
4월 15일 귀국선에 올라 무사 귀환한다.
당시 안희완 영사는 북한의 지속적인 압박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집에 음악테이프를 달라고 베트남 현지 친구에게 부탁하여 받은 노래가 바로 패티김의 서울에 찬가 이다.
서울의 찬가를 들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울에서 살아야겠다는 힘을 얻었다고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jtbc 2014.7.24 4부작 다큐멘터리 사이공1975 내용 중에서 .
세월의 흔적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중월은 정치적으로는 서로 동맹...
그렇더군!
특히 쫑 총비서가 이끄는 보수파가 집권한 이후로 친중행보가 더 가속화되고 있는 듯합니다
북한은 진보주의,중국,월남도 덴마크 밀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