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태종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일찌감치 큰아들 양녕대군(1394~1462년)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때가 1404년(태종4년)으로 양녕대군의 나이는 10세에 불과했다. 이토록 세자를 빨리 책봉한 것은 건국 초 불안했던 정국에서 안정화하기 위해서였다.
태종은 건재한 상황에서 양녕대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양녕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원인은 세자를 두고 벌어지는 신하들의 권력 투쟁보다는 세자 자체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문무에 능했던 양녕대군은 태종의 기대에 부응하며 성장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표사를 맡아 명나라에 새해 인사를 다녀오기도 했으며, 태종이 아프면 정무를 맡아 별 탈 없이 잘 운영했다.
그러나 태종의 바람과는 달리 성년이 될수록 양녕대군은 사냥과 여자에 푹 빠져 세자 수업을 소홀히 했다. 태종은 양녕대군의 행동을 고치기 위해 양녕대군에게 매와 여자를 공급하는 구종수와 이오방을 유배 보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녕대군은 곽선의 첩 어리를 임신시키는 등 세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와 황희는 양녕대군을 보호하려다가 처벌받기도 했다.
반면 셋째 충년대군(세종)은 뛰어난 학문과 통찰력으로 태종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자신의 문제, 특히 여자에 관해 관여하지 말아달라며 반항했다.
이를 계기로 태종은 유정현을 중심으로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라는 관료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 것에 구애받지 않고, 교외로 사냥을 다니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양녕대군은 여러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때마다 세종은 양녕대군이 벌인 일을 수습해주며 우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이 죽고 왕실의 어른이 된 양녕대군은 젊은 시절 정치에 무관심했던 모습과 달리 정치적 행보를 걷기도 했다.
세조의 즉위를 인정했던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안평대군과 단종을 죽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물론 안평대군과 단종의 죽음이 양녕대군의 건의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왕실의 대표로서 그가 세조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틀림 없었다.
양녕대군이 젊은 시절과는 달리 노년에 정치에 참여한 것을 두고, 왕위를 충녕대군에게 넘기려고 세자 시절 일부러 문제를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오호
오호!
정보추
츄츄
세자책봉이라는게 참.... 권력이란게 사람을 다르게 만드네
그렇지? 느낌상 흑화한게 아닌가 싶기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