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태종
문익점(1329~1398)이 서장관(조선시대에 외국에 보내는 사행직의 하나)으로 원나라에 갔다 돌아올 때, 목화씨를 붓 통에 숨겨왔다는 사실이 진짜인지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오기 이전부터 고려에서 목화가 재배되고 있었고,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야 할 정도로 목화가 원의 중요한 자원이었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그러나 문익점이 우리나라에서 목화 재배 보금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문익점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내려와서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심었다. 그러나 정확한 재배 방법을 알지 못해 심었던 목화 중에서 단 한 그루만 살릴 수 있었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3년간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목화 재배에 성공했다.
그러나 재배에 성공했어도 목화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아내는 방법을 알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었다. 때마침 목화에서 씨를 빼고 실을 뽑는 방법을 아는 원나라 출신의 승려 홍원이 정천익의 집에 방문했다.
정천익과 문익점은 승려 홍원에게서 목화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법을 배워 전국에 보급했다. 다른 이야기로는 문익점의 아들 문래가 실을 뽑는 법을 발명하고, 문익점의 손자 문영이 면포 짜는 법을 발명했다고도 한다.
논란과는 상관없이 문익점이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와 보급에 노력한 결과, 조선시대에 들어서 백성 모두가 추위에서 벗어 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태종 때에 이르면 목화 재배와 면포 만드는 방법이 정착되어, 일본에 무명을 수출하는 동시에 목화 종자와 제직 기술을 알려줄 정도로 면포 제작이 크게 발전했다.
세조 때는 천민들도 목화로 만든 따뜻한 옷을 입고 겨울을 날 수 있게 되었고, 16세기에는 목화로 만든 무명이 대량 생산되면서 옷의 기능을 넘어 화폐의 기능도 갖게 되었다.
태종은 문익점의 공덕을 높이 평가해 문익점 사후 그의 품계를 참지정부사 강성군으로 올리고, 문익점의 아들에게도 정3품의 사헌감찰직을 주었다.
세종은 문익점을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제후란 뜻으로 부민후라 부르고, 문익점에게 충선공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이후 문익점의 고향 단성에 도천서원을, 전라남도 장흥에 월천사우를 세워 문익점의 공로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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