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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34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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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3대 태종

 

태상왕이 된 이성계는 왕이 된 이방원을 만나는 첫 자리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물었다. 태조에게 있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태상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여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있는 곳으로 가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한양 천도는 자신이 이룬 조선 건국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많은 관료는 태조의 뜻과 달리 한양으로의 재천도를 반대했다. 타협점으로 개성과 한양 두 곳 모두를 삼자고 주장하는 관리도 있었다. 

 

깊이 고심하던 태종은 결국 태조 이성계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훨씬 이득이 크다고 판단했다. 1405년(태종5년), 태종은 한양으로 환도할 것을 의정부에 통보하고 궁궐 수리를 위한 임시 관아인 궁궐수보도감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을 찾아와 풍수지리적으로 한양보다는 무악이 수도로 적합하다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지금의 서대문 지역으로, 조선시대 때는 서울에 포함되지 않았다). 

 

태종은 왕자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우며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하륜의 의견을 무시할수 없었다. 

 

천도의 장소로 한양 , 개경 , 우악 세 곳이 나오자, 태종은 종묘에서 선조들의 뜻을 물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준, 조휴, 김희선, 박석명, 이천우 다섯명과 종묘에 들어간 태종은 쇠돈을 던져 점을 쳤다. 그 결과 한양은 2길 1흉이 나왔고, 개경과 무악은 1길 2흉이 나왔다. 

 

태종은 종묘에서 나온 점괘에 따라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한양 천도에 대한 반대가 있었지만, 태종은 한양으로 천도하겠다는 의지를 바꾸지 않았다. 

 

이궁으로 창덕궁을 지은 태종은 1405년(태종5년)10월,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서 문부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는 경북궁 전각 곳곳에 정치적 라이벌이던 정도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경복궁은 왕장의 난이 벌어진 곳이기에 태종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관료들과 백성들에게서 태종에 대한 안 좋은 소리와 구설수가 나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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