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태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지만 아직은 여전히 고려에 충성하는 관료와 백성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개경을 수도로 삼고 머문다는 것은 고려는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자칫 반란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고려를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 수도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불교와 유교,그리고 풍수지리 사상 등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좋은 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다면 왕건이 송악을 수도로 삼으며 얻었던 효과처럼 조선도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개경에 근거지를 둔 관료와 백성들은 수도 이전을 강하게 반대했으나, 조선으로서는 어차피 한 번은 치러야 할 일이었다. 태조가 강력하게 수도 이전을 천명하자 권중화가 계룡산을 새로운 수도로 삼자고 강하게 추천했다. 직접 계룡산을 방문한 이성계는 매우 흡족해하며 수도 건설을 위한 공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10개월에 걸쳐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이 풍수리상 계룡산이 망국의 자리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일설에는 이성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곳은 정씨가 도읍할 땅이니 물러가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계룡산으로 수도를 옮기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수도 선정을 두고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거론된 장소가 오늘날 서울의 연희동 / 신촌 지역과 왕십리 지역, 그리고 경북궁 자리였다. 하륜은 도선의 비기를 근거로 연희동 / 신촌 지역을 수도로 정하자고 주장했으나, 구너중화와 조준이 반대했다. 이때 무학대사가 왕십리 지역을 답사하다 만만 노인게에서 "서북쪽으로 십리를 가면 좋은 땅이 보일 것이오."라는 말을 들었다며 경북궁 자리를 추천했다.(왕십리 지명은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왕이 머물 곳이 십 리밖에 있따고 알려주었다는 전설에서 나왔다고 알려진다.) 이후 여러 사람이 모여 오랜 논의 끝에 궁궐은 경북궁 자리에 세우기로 최종 결정 되었다.
경북궁이 지어지자 궁궐을 보호할 성곽을 쌓는 과정에서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삼각산 인수봉으로 성곽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무학대사는 인수봉은 노승이 오백나한(석가의 제자인 500인의 성자)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라며 인수봉 밖으로 성곽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팽팽하게 맞섰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던 이성계는 하늘의 뜻을 묻는 제를 올렸는데, 신기하게도 다음 날 선을 그어놓은 듯인수봉을 경계로 눈이 녹아 있었다. 하늘의 계시라 생각한 이성계는 유학자들의 의견을 따라 인수봉 안으로 성곽을 지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이때부터 쇠퇴하게 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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