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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페이지 조선사> 008 창업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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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1388년(우왕14년), 우왕은 요동 정벌을 위해 군대를 징집하고 최영을 팔도도통사에 임명하며 그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직접 요동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서경에 머물렀다. 하지만 요동정벌을 위한 출정이 다가올수록 최영이 없는 정국 운영은 불안했다. 

 

결국 우왕은 최영을 서경에 머무르게 한 뒤, 이성계와 조민수만 요동 정벌에 출정시켰다. 요동 정벌에 처음부터 불만을 품고 있던 이성계는 최영이 서경에 머물자, 이것이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최영의 계략이 아닌지 의구심이 생겼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정벌군은 압록강 지류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했으나, 비가 많이 와서 건널 수 없다는 이유로 14일간 움직이지 않았다. 이 기간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에게 4불가론을 제시하며 회군을 종용했다.

 

우왕과 최영이 이들이 위화도에서 오래 머무는 것을 질책하다, 위기를 느낀 조민수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되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돌아가 이들에게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이끄는 요동 정벌군은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대군인 반면, 개경에는 최영이 지휘할군사가 많지 않았다. 결국 군대가 없는 최영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이성계에게패하고 말았다.

 

하루 만에 개경을 함락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창왕을 옹립하고 우왕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다. 가장 위협이 되었던 최영은 고봉(고양식)으로 유배를 보낸 뒤 처형했다. 우왕과 최영을 제거한 이성계는 고려의 좌시중이 되었고 조민수는 우시중이 되어 고려 조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으로 서로 손을 잡은 이 둘의 관계를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을 건국할 준비를 하던 이성계는 사사건건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조민수를 가만두지 않았다.

 

1389년(창왕1년), 추진하던 과전법을 조민수가 반대하자 이성계는 조준의 탄핵을 이용해 그를 창녕으로 유배 보냈다. 조민수는 유배지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우왕이 공민왕의 자손이 아니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반대하다 이듬해 창녕에서 죽었다. 이로써 요동정벌의 중심에 있던 우왕, 최영, 이성계, 조민수 중에서 이성계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제거되면서 조선 건국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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