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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무학의 지게꾼 아들 28세에 도전해 3선째죠”(2013년04월25일 조경태의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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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포커스①]조경태 의원…4명 운동원에 100만원 갖고 정치실험 역정
 

정단비기자

 


 



‘조경태(45, 부산 사하을) 의원’ 하면 민주통합당에서 유일하게 부산에서 내리 3선한 독보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국회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한 그는 부산 사하구의 가로등이 몇 개인지도 알 만큼 지역구 사정에 해밝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정치인이라면 흔히들 유력한 집안의 자녀를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조 의원은 가난한 자갈치시장 지게꾼의 아들로 태어나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사라진 이 시대의 ‘살아있는 신화’로 자리매김했다. 대학강사 시절 부산 구포시장 앞을 지나가다 노점상을 완력으로 제압하는 단속반을 우연히 목격하고 항의했으나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약함을 자책한 것이 정치에 투신한 계기였다. 현실은 그러나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신한국당(현 새누리당)의 텃밭인 부산에서 15대·16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섰다가 연거푸 참패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약자를 돕겠다는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지난번의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에 이어 최근 3번째로 민주당 최고위원선거에 출사표를 낸 조 의원의 뚝심과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스카이데일리가 조 의원의 발자취를 짚어 봤다.
 



 


 

▲ 조경태 민주통합당 의원 ⓒ스카이데일리

1968년 1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조경태 의원(민주통합당)은 부모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착한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병원에서 입원을 권유할 정도로 아팠지만 ‘형편이 안 되니 약물로 치료해 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릴 정도로 조숙한 아이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농사 짓던 조 의원의 부모는 그가 2살 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대처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삶의 터전을 부산으로 옮긴 조 의원의 아버지는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지게꾼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밭일을 하며 자녀들을 키웠다.


 

 


 

‘지금의 나’를 만든 ‘위대한 부모님’


 

 


 

“부모님은 못 살아도 도시로 가서 자녀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그때 어머니의 결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모두 무학이시지만 지혜만큼은 누구 못지않으셨어요.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만큼 결단력이 있었던 거죠.”


 

 


 

아버지의 ‘성실함’과 어머니의 ‘결단력’을 물려받았다는 조 의원은 이들 성품이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아버지는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성실하게 살라는 교훈을 주셨다”고 조 의원은 회고했다.


 


“아버지가 자갈치 시장에서 지게꾼을 하시면서 하루 임금에서 일부를 떼어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수 연탄을 사다 드렸다는 사실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또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는 게 일상이셨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짐을 지게로 나르며 힘들게 번 돈으로 나눔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런 정신을 물려주신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 조경태 의원의 초등학교 졸업 사진


자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남에 대한 배려심을 잃지 않는 착한 인간성을 이어받은 조 의원은 ‘너무 올곧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그는 이에 대해 “원칙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때때로 하게 되는 쓴소리가 약간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불의를 못 참는 열혈 청년, 현실 정치에 도전하다


 

 


 

조 의원은 당초 집안에 보탬에 되고자 이공계로 진학해서 엔지니어를 하려고 했다.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부산대 공대에 들어간 조 의원은 토목공학을 전공해 건설 현장에서 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부에 미련이 남아 곧바로 취업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며 석·박사 과정까지 마친 후 부산의 한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잡았다.


 

 


 

“제가 집안에서 대학을 나온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있었고 형제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앞섰죠. 어머니께도 빨리 취직해서 짐을 덜어들이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 운명적 사건이 일어났다. 강의를 위해 부산 구포시장 5일장 앞을 지나가다 구청 단속반들이 노점상의 물건들을 완력으로 압수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불법을 저지르긴 했지만 통곡하며 저항하는 노점상들을 보며 안타까웠던 조 의원은 단속반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항의했다. 단속반은 그러나 “당신이 뭔데 공무집행을 방해하느냐?”며 되레 호통을 쳤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안타까운 광경을 보고도 일개 대학강사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없구나. 내가 정말 무기력하구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당시 아버지 연배의 노점상이 그 상황을 지켜보며 말없이 눈물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때부터 우리 사회가 이런 약자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후략

https://www.hankyung.com/politics/amp/20130425568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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