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사태 직후 한국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당시 북한이 우리 측 주요 인사에게 접근해 위장평화공세를 펼친 정황이 드러났다.
29일 통일부는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정치 및 체육 분야 남북회담문서를 담은 '남북대화 사료집' 제9권과 제10권 중 965쪽 분량을 공개했다.
사료집에 따르면, 12·12 전후 '서울의 봄' 시기인 1980년 1월 북한은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 등 각계 인사 12명에게 만남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북한은 서한에서 우리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칭하는 등 이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북한은 김일 조국통일평화위원장 부주석 명의로 당시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연합' 공동의장, 김수환 추기경 등과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인물인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에게도 같은 취지의 서한을 보냈다.
특히 북한은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후 단절된 남북 대화를 총리 만남으로 재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로 인해 끊어졌던 남북 직통전화를 개통하고, 남북 총리 대화를 판문점에서 개최하기로 하는 등 관계 개선에 진전을 보였다. 또 1979년 12월20일 북한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함께 나가자며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대표 회담을 재촉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을 선언하며 권력을 장악하자 북한의 유화적인 태도는 돌변했다. 1980년 2월부터 10차례 이어진 남북총리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은 1980년 8월에 끝났고, 남북직통전화도 그해 9월25일 다시 끊겼다.
이듬해인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신년 국정연설에서 김일성을 '주석'으로 존칭하며 최고책임자 상호방문과 회담을 제의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은 "전두환이 감히 남조선의 최고책임자로 자처하면서 상호방문을 떠드는 것은 그야말로 앉을자리 설자리도 가리지 못하는 무뢰한 망동"이라며 일축했다.
북한이 '서울의 봄' 시기 혼란을 틈타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는 위장평화공세를 펼치다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다시 강경 기조로 돌아선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번에 공개된 회담문서에는 △남북 간 변칙접촉(1979년 2~3월, 3회) △남북 간 탁구협회 회의(1979년 2~3월, 4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방한서 남북미 3당국 회의 제의(1979년 7월) △남북 간 총리 회담을 위한 실무대표접촉(1980년 2~8월, 10회)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회담 제의(1981년 6월) △남북한 체육회담 제의(1981년 6월) 등이 포함됐다.
공개된 남북회담문서는 통일부 남북관계관리단,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국립통일교육원, 국회도서관 내 남북회담문서 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12/29/20231229001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