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세종
세종이 집권했던 시기에는 과학이 매우 발달해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 문물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측우기다.
둥근 원통의 모양을 갖춘 측우기는 강수량을 측정하는 도구로 유럽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종 때 만들어진 측우기는 오늘날 볼 수가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것은 공주 충청감영에 보존된 측우기로 1837년(헌종3년)에 제작된 것이다. 높이 32cm에 안지름 1cm, 깊이 10.8cm의 충청감영 측우기를 통해 세종 때 만들어진 측우기의 모습을 추정하고 있다.
측우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조선은 강수량을 측정하는 기준과 도구가 없었지만 조정에서는 늘 강수량을 측정했다.
다만 땅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로 이를 측정하다 보니 토양에 따라 측정 기록이 달라져서 수치를 표준화하기가 어려웠다.
세자 시절의 문종은 강수량 측정의 오류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구리로 그릇을 만들어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제작했다.
그리하여 조선은 1441년(세종23년), 호조에서 서운관과 마전교 서쪽, 그리고 한강 변 암석에 문종이 제작한 측우기를 설치하고 지방의 각 고을에도 도자기로 만든 측우기를 내려보내 강수량을 측정하게 했다.
1442년(세종24년)에는 도별로 길이 1척 5촌, 지름 7촌으로 규격화시킨 측우기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을 수령에게 강수량과 더불어 비가 내린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중앙에 보고하도록 했다.
그 결과 지역별 강수량 데이터를 기반으로 농업 진흥과 조세 확보에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러한 측우기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중단되었다가 1770년(영조46년)에 다시 부활되었다.
측우기를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다. 국가에서 강우량을 통계 내어 농사 진흥에 활용했다는 주장과 기우제의 도구로 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측우기를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현재 측우기를 설치했던 측우대는 관상감 측우대, 창덕궁 규장각 측우대, 경상감영(선화당)측우대, 통영 측우대 4개가 남아 있으며,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국보 제 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종이 오래 역사 했으면 역사가 어찌 되었을까?
너무 안타깝게 일찍...
문종도 휼륭한 왕됬을듯
실제로 세종말년(한글만들시기)에
업무 대신했다고 함
그러니까 근대 너무 건강상에 너무 열심히 하셨어 ㅠㅠ
ㅊㅊ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