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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똥장군네 참수부대 방문교육 시급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안분지족 쌈 싸먹고 객사한 호라즘 王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있다. 편한 마음으로 제 분수‧주제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호라즘(Khorezm)은 서기 1077~1231년 존속한 왕국이었다. 당초 미약했던 호라즘은 1200년 무렵부터 영토를 폭발적으로 넓혀 1215년께에 동부 이슬람 세계를 평정했다. 6대 샤(Shah‧왕)인 무함마드 2세(Muḥammad Ⅱ)가 천도(遷都)한 수도 사마르칸트(Samarkand)는 사막에 핀 꽃이자 오아시스로서 번창했다. 그러나 자만은 독이 됐다.

 

호라즘 왕국이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동아시아의 몽골(蒙古)은 여진족(女眞族)의 금(金)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 중이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서요(西遼)까지 무너뜨린 칭기즈칸(Chingiz Khan‧생몰연도 1167?~1227)은 참모 야율초재(耶律楚材)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역(西域)과의 교역에 나섰다.

 

앞서 칭기즈칸은 “중원인들을 다 죽이는 대신 세금을 거둬라”는 야율초재의 조언에 큰 재미를 본 상태였다. 조세(租稅)라는 개념이 없었던 몽골인들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산더미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억만금에 놀라 자빠졌다고 한다. 당초 칭기즈칸은 만리장성(萬里長城) 너머 중원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도시는 황야로 만든 뒤 대륙 전체를 목초지(牧草地)로 개조한다는 생각이었다. 당대 몽골군의 학살극은 유럽인들마저도 치를 떨 정도로 엄청났다.

 

아무튼 칭기즈칸은 대규모 사절단 겸 상단(商團)을 호라즘에 파견했다. 그런데 1218년 오트라르(Otrar)의 성주(城主)였던 가이르 칸(Ghayir Khan)이 ‘간첩’ ‘이교도’를 벌한다는 구실로 상단을 모조리 쳐죽이고 가져온 재물을 빼앗는 사건이 벌어졌다. 칭기즈칸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으며 따라서 사절단에는 세계 각 국에서 모인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제국 치세(治世)에는 기독교‧불교‧이슬람 성직자가 한자리에 모여 세계 최초 종교토론을 벌인 일도 있었다.

 

이 소식에 펄펄 뛰었으나 금나라와의 전쟁이 급했던 칭기즈칸은 무함마드 2세에게 사신단을 보내 가이르 칸 처벌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망나니는 샤의 외가 쪽 친척이었다. 무함마드 2세는 사건전말을 설명하고 보상을 약조하는 대신 그마저도 동방(東方)의 ‘이교도들’을 죽여댔다.

 

사신단 일부는 수염을 깎은 뒤 내쫓았다. 당시 시대상 남성 특히 무슬림(Muslim) 남성에게 있어서 수염이 사라진다는 건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었다. 지금도 이슬람근본주의 무장단체들은 점령지 남성들에게 수염을 기를 것을 강요하고, 숱이 없으면 가짜 수염이라도 붙일 것을 요구하고, 거부하면 처형하고 있다.

 

무함마드 2세, 가이르 칸, 그리고 호라즘은 과대망상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폭발한 칭기즈칸은 대금(對金) 전쟁은 잠시 중단한 채 네 아들과 10여만 대군을 이끌고서 사막의 저 하룻선인장에게 안분지족을 교육하러 1220년 친정(親征)에 올랐다.

 

‘핵폭발’처럼 빛나는 갑옷으로 ‘삐까뻔쩍’했던 수십만 호라즘군(軍)은 훗날의 유럽기사단처럼 동방의 누더기 군대를 우습게 봤다. 지금도 몽골 조랑말은 서구의 개량마(馬)와 달리 크기가 작고 볼품없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였다. 몽골말은 덩치는 그러한 대신 지구력이 좋았고 훈련이 매우 잘 돼 있었다. 게다가 몽골군은 1인당 수 필의 말을 몰고 다니면서 하나가 지치면 다른 말로 갈아타는 식으로 쉼 없이 진격했다. 식사는 말 등에서 육포(肉脯) 등으로 해결했다. 몽골인들은 지금도 골격‧체력 좋기로 유명하다.

 

몽골군의 번개 같은 전격전(電擊戰)에 놀란 호라즘은 당황했다. 각 성지(城地)가 각개방어하는 사이에 네 갈래로 나뉜 몽골군은 호라즘 영토를 마구 휘젓고 다녔다. 칭기즈칸의 두 아들 오고타이(Ogotai)‧차가타이(Chaghatai)는 단 몇 달의 포위전 끝에 오트라르를 함락했다. 유목(遊牧)민족인 몽골 측은 대금전쟁 과정에서 공성전(攻城戰) 노하우도 터득한 상태였다. 칭기즈칸은 탐욕스런 가이르 칸의 두 눈알에 금은(金銀) 녹인 물을 부어넣어 죽여버렸다.

 

무함마드 2세도 사랑의 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마르칸트는 포위 단 11일만에 무너졌다. 그 순간에도 다른 갈래의 몽골군들이 호라즘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에 성주들은 수도를 구하러 오지 못했다.

 

무함마드 2세는 기적처럼 달아났으나 몽골군은 한 번 겨눈 사냥감은 놓치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두 장수 제베(Jebe)‧수부타이(Subutai)에게 별동대(別動隊)를 내주고서 적 우두머리를 뒤쫓게 했다. 무함마드 2세는 도피길 내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피폐해지다가 카스피해(Caspian sea)의 외딴 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비록 무함마드 2세의 아들이 살아남아 허울뿐인 샤 자리를 계승하긴 했으나 그렇게 호라즘은 사실상 멸망했다. 찬란했던 왕국은 철저히 파괴됐으며 지금은 사막 아래에 묻혀 그 흔적을 찾기 거의 힘들다.

 

참고로 활쏘기의 명수였던 제베는 과거 칭기즈칸의 가슴을 맞춰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전적이 있었다. 원한이 얽히고설킨 비정한 유목사회에서 원수는 포를 떠 죽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제베의 궁술(弓術)과 솔직함을 아낀 칭기즈칸은 그를 수하로 거두고 제베라는 이름도 하사했다. 제베는 당대 몽골어로 ‘화살’이란 뜻이었다. 제베‧수부타이의 추격전은 후일 몽골제국의 유럽원정 루트를 뚫는 계기가 된다.

 

북한이 ‘분뇨 풍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우리 정부는 문재인정부 때 남북 간에 체결된 9‧19군사합의 전체 효력 정지를 최근 단행했다. 또 개성까지도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대북(對北) 확성기 방송 재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로 했다. 호라즘은 그래도 제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라도 했지, 무능으로 도배한 북한정권은 “못 살겠다 갈아엎자”는 반체제 세력들로 오래 전부터 몸살을 앓아왔다. 필자가 십수년 전 대북라디오방송(심리전) 업계에서 일할 당시에도 이미 무려 ‘북한군 장성들’ 사이에서 반란모의가 오갔다.

 

안분지족해도 반란군‧참수부대가 방문교육 갈까 말까 한 판국에 신나게 제 무덤 파는 김정은‧김여정의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조만간 대한민국 법정(法廷)에 설 저들을 위해서라도 사형제 재개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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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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