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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관제사 꺾은 美 레이건, 탄광노조 이긴 英 대처 … 尹대통령은?

뉴데일리

■ 레이건의 뚝심

1981년 8월 3일 미국 전역의 항공관제사들 13,000여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항공관제사들의 요구는 임금 인상과 작업 시간 단축이었다. 이들의 파업으로 인하여 미국 전역에서 7,000여 편의 항공편이 결항했다.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40대)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레이건은 즉각 이들의 파업이 “불법”이라고 단정하면서 48시간 이내에 파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항공관제사들이 직장 복귀 명령을 시한 내에 수용하지 않자, 레이건 대통령은 8월 5일 <대통령행정명령>(Presidential Exeuctive Order)으로 직장에 복귀하지 않은 11,539명의 항공관제사 전원을 해고했다.뿐만 아니라, 이때 해고된 항공관제사들은 그 이후에도 다시는 재고용하지 못하도록 <연방항공국>에 지시했다. <연방노동청>은 이해 10월 22일 항공관제사 파업을 주도한 <연방직업항공사조합> (PATCO) 설립 허가를 취소해 버렸다.

■ 불편 감수 미국 국민들의 성숙함

항공관제사들의 파업에 대한 레이건의 이 같은 강력한 대처는 “항공관제사들은 군인들이나 소방관들처럼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지급받는 공복이기 때문에 파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항공관제사들이 파업을 행동으로 옮기자 레이건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들의 파업이 “합법적인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불법적인 것”이라는 대답을 듣자, 그는 “불법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냐”면서 “그들이 만약 파업을 시작한다면 파업을 끝낸 뒤에는 복귀할 직장이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했다.

노조의 불법 행동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의 이 같은 단호한 대처에 대해 대다수의 미국민들은 일시적인 불편을 감내하면서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찬동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 같은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엎고 <연방항공국(FAA)>을 중심으로 감독관들과 파업 불참 관제사들 및 지원 나온 군 관제사들이 불철주야 수고한 결과 단시일 내에 파업으로 인한 차질의 80%를 만회했다. 는 불과 수년 안에 1981년 수준 이상의 항공관제사들을 신규 채용하고 훈련해 냄으로써 파업으로 인한 상처를 “죽 떠먹은 자리”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 대처도 레이건처럼 단호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84년 영국에서는 연간 3억4천만 달러에 달하는 적자를 완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연간 석탄 생산량 중 4백만 톤을 감산하려는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의 보수당 정권이 이에 저항하는 <광산노조>의 파업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의 재상](Iron Lady) 대처 수상은 노조와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정부의 시책을 완강하게 고수했다. 이로 인하여 대처 정권의 경찰력과 탄광노조 사이에는 때때로 폭력이 수반되는 충돌이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가장 대표적 충돌은 1984년 6월 18일 남부 요크셔(Yorkshire)의 <오그리브’(Orgreave) 강철공장> 코크스탄 작업장에서 발생했다. 1만여명의 광부들과 5천여명의 경찰관들이 충돌, 51명의 광부와 72명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고 수십명의 광부들이 체포되었다. “경찰관에 의한 증거 조작”이라는 부산물도 등장했다.

그러나, 대처가 강경 일변도의 대처를 고수하는 가운데, <민주광부노조> 등 대안(代案) 노조들이 등장, <광산노조>의 힘이 약화됐고 더불어 많은 광부들의 독자적 직장 복귀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85년 6월 대다수의 나머지 파업 광부들도 악대를 앞세우고 다양한 깃발을 든 시민들과 행렬을 이루어 탄광으로 복귀함으로써, 이들의 유혈적 파업은 싱거운 피나레의 막을 내렸다.

■ 끝까지 버틴 대처가 옳았다

이 파업은 아무런 합의도 없는 <광산노조>의 일방적 패배였다. 대처는 어떠한 양보나 타협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처의 보수당 정부는 20세기에 들어 어느 정권도 이룩하지 못한 3기 연임에 성공, 11년 동안 정권을 유지하는 신화(神話)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때 광산노조 파업 실패 이후 영국 경제는 호황(好況)을 구가했다. 그 여파로 영국의 노조와 광산업은 퇴조기(退潮期)로 급속하게 이행했다. 그 결과 한때 영국 전체 노동자의 40%에 이르렀던 <광산노조> 조합원의 수자는 20%로 급감했으며, 그 뒤로 더욱 줄어들고 있다.

1994년 영국의 광산업은 드디어 민영화되었다. 이때까지 영국이 보유하고 있던 15개의 탄갱(炭坑)은 2013년 대처가 타계했을 때 3개가 살아남아 있었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가 오늘 이처럼 레이건 때의 [항공관제사 파업]과 대처 때의 [광산노조 파업]을 재조명해 보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의사 파업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레이건과 대처 때의 재조명을 통하여 우리가 새삼 인식하는 사실은, 파업의 수습은 결국 그 시대 정치지도자의 역량과 의지 그리고 용기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같은 위기 극복을 통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역사적 선례를 발견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역사적인 것이 될 4.10 총선을 앞두고 [의사들의 이익 챙기기] 로 시작된 이번 의사 파업이 한없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많은 동료 국민들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03/31/20240331000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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