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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성녀(聖女) 오타 쥬리아의 사랑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항거하되 우호적인 21세기 한일관계 되길

 

1592년 5월 일본국(日本國)의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풍신수길)에 의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했다.

 

태생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쇼군(將軍)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조선(朝鮮)을 전진기지 삼아 명(明)나라를 쳐서 천자(天子)에 오를 꿈을 가졌다고 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측근들에게 줄 봉토(封土)도 마련하고, 더 이상 쓸 데가 없는 사무라이(侍)들 머릿수도 줄일 겸해서 출병했다는 설도 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倭軍)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이들은 조선국왕 선조(宣祖)를 사로잡아 전쟁을 일거에 끝낼 계획이었다. 왜군은 보병 중심 군대의 그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동력으로 진군해 상륙 약 20일 만에 한성부(漢城府‧한양)를 점령했다. 정탐을 통해 왜군들이 밥 한 공기만으로 한 끼를 때우는 걸 엿본 조선 조정은 “저 지독한 놈들이 밥까지 굶으면서 한양으로 쳐들어오는구나” 경악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고봉밥이 주류이던 조선인과 일본인 간 식사량 차이에 따른 착각이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 번 피를 본 병사들은 통제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왜군 대다수는 전국시대를 경험한 경력자들이었다. 자연히 왜군 상당수는 전쟁 틈틈이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 땅을 노략질했다. 부녀자 겁탈과 인신매매도 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전쟁범죄의 일부였다.

 

‘가시밭 속의 장미’ 오타 쥬리아(おたあジュリア‧생몰연도 미상)도 왜군에 납치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성씨가 김 씨라는 것만 확인될 뿐 그녀의 정확한 조선식 실명은 알 수 없다. 원래는 실존인물이었는지조차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반 들어 오타가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는 정황이 조금씩 드러났다.

 

1970년대에 결성된 일본의 국민밴드 ‘사잔 올 스타즈(Southern All Stars)’가 그녀를 주제로 한 곡 ‘꿈으로 사라진 쥬리아(夢に消えたジュリア)’를 발표하는 등 오타는 열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권력자에게 당당히 맞서면서도 원수를 사랑으로 품은 자애로운 성녀(聖女)의 모습이 많은 일본인들을 사로잡았다.

 

베일에 싸여 있던 오타의 삶은 지난해 4월 약 400년 전의 서한 세 통이 공개되면서 상당부분 드러났다.

 

이 편지는 오타가 전쟁통에 헤어져 생사조차 몰랐던 7살 터울의 남동생 운나키(うんなき)에게 보낸 친필서한이었다. 서신들을 보관해오던 운나키의 직계후손 무라타 노리오(村田徳男‧1941~)씨가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박물관(萩博物館)에 공개를 맡겼다고 한다. 이 세기의 사건은 NHK‧아사히(朝日)신문 등 현지 언론들에 의해 대서특필됐다. 아사미 마사카즈(浅見正和) 게이오(慶応)대 교수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한국 언론으로서는 최초로 서한을 입수한 가톨릭평화신문(CPBC) 보도에 의하면 첫 편지는 1609년 8월19일 하기시(萩博市)에서 하층민으로 살던 운나키에게 보내졌다. 편지는 운나키가 정말 자신의 남동생이 맞는지 확인하는 내용이다.

 

오타는 편지에서 자신을 “제운대군절도사(濟運大軍節度使)로 불린 선조의 측근 김세왕온(金世王温)과 부인 홍 씨 사이의 다섯 자녀 중 장녀”라고 소개했다. 국내 사료에서는 제운대군절도사‧김세왕온 등을 찾을 수 없어 납치 당시의 정신적 충격과 타국에서의 오랜 고생에 시달렸던 오타가 기억오류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오타는 자신의 이름을 타아(たあ)라고 밝히며 임진년(壬辰年‧1592년) 당시 13살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남동생을 운나키로 지칭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오타의 본명이 김다아‧김타아 또는 김단아, 운나키의 본명이 김운락(운낙)‧김운악‧김운학‧김응락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남매는 머잖아 상봉했다. 부모를 잃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혈육(血肉)을 만난 이들이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을지는 분명하다.

 

서신, 학계 연구, 야사(野史) 등에 의하면 오타는 1593년 또 다른 11살짜리 동생 및 몸종과 함께 왜군에게 사로잡혔다. 부모는 모두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에 끌려간 오타는 왜군 선봉장이자 기리시탄(キリシタン‧천주교 신자)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의 양녀(養女)로 거둬졌다. 고니시는 많은 조선인 고아들을 입양했다고 한다. 오타는 1596년 프랑스의 모레혼(Morejon) 신부로부터 쥬리아(율리아)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 기구한 삶에 눈물로 밤낮 지새웠던 오타는 종교에 귀의했다.

 

임진왜란이 패전으로 끝나고 히데요시가 분사(憤死)하자 열도는 급속도로 분열됐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서군(西軍)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의 동군(東軍)은 천하패권을 두고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격돌했다. 전투는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서군이었던 고니시는 패사(敗死)했다. 새롭게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를 개창하고 천하인(天下人)이 된 이에야스는 오타를 제 사람으로 거뒀다.

 

히데요시와 달리 친(親)조선파였던 이에야스는 오타의 미모‧인품에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주앙 호드리게스(João Rodrigues Tçuzu) 신부는 1605년 예수회연보 보고에서 오타를 ‘가시밭 속의 장미’로 표현했다. 그러나 오타는 이에야스의 구애를 번번이 물리쳤다. 그녀는 이에야스의 식사 시중 등 업무가 끝나면 밤마다 성경을 읽고 다른 시녀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할 뿐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천하의 이에야스에게 ‘물’ 먹인 것이었다.

 

그럴수록 이에야스는 오타에게 더욱 빠져들었다고 한다. 이 무렵 슨푸성(駿府城)에서 누나와 재회한 운나키에게는 고소데(小袖‧소매부리가 좁은 일본 전통의상)와 칼‧말(馬) 등을 하사했다. 이에야스의 눈치를 보던 모리(毛利) 가문은 운나키에게 무라타라는 성씨와 야스마사(安政)라는 이름을 내리고 사무라이에 봉했다. 모리 가문은 직전까지만 해도 운나키를 종처럼 부려왔다.

 

오타의 배교(背敎)를 애걸하기도 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천주교 금교(禁敎)를 국책(國策)으로 삼고 있었다. 적발된 기리시탄은 그대로 처형됐다. 따라서 오타도 죽음을 비껴갈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배교하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밖에 없다. 나도 구해줄 수 없다. 제발 거짓으로라도 배교한다고 해서 목숨을 보전하라”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타는 “지상의 왕을 위해 하늘의 왕을 등질 수 없다”며 끝내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오타가 죽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 1612년 이에야스는 그녀를 출궁(出宮)시켰다.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인근에 위치한 절해고도(絕海孤島)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된 오타는 고된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즈시마에서는 지금도 매해 주민들이 쥬리아제(祭)를 열고 있다.

 

오타는 이에야스 사망 당해인 1616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녀는 열도 각지를 돌며 부모를 앗아가고 집안을 결딴낸 ‘원수’ 왜인(倭人)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다. 1619년에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여아들에게 교리‧성가를 가르치고 병자를 간호하다가 추방되기도 했다. 그녀의 마지막 기록은 1622년 ‘오사카(大阪)에서 선교사들 도움을 받아 지내고 있다’는 예수회 일본관구 측의 편지다. 이세훈 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은 CPBC에 “오타가 남동생이 있는 하기로 가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

 

오늘(1일)은 3‧1절 105주년이다. 한일(韓日)은 임진왜란‧식민지배 등 악연도 있지만 함께 나아가야 할 이웃나라임은 틀림없다. 400년 전 막부에 항거하면서도 일본인들을 사랑으로 품었던 오타 쥬리아처럼, 일본정부의 부당함에는 단호히 맞서면서도 민간교류는 활발히 이어가는 21세기 한일관계가 되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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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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