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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친명(親明)이 낸 죽음의 O‧X 퀴즈

오주한

‘李 체포찬성 의원’ 색출 나선 친명계 논란

“한국판 간웅들” 오명 민족史에 회자될 것

 

권력‧물욕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등장인물인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조조(曹操‧생몰연도 서기 155~220)는 탐권낙세(貪權樂勢)의 화신이다. 천자(天子)를 옆에 끼고 능수능란히 천하를 쥐락펴락한 그의 이면은 만인(萬人)에 대한 불신 그리고 대학살로 점철돼 있었다.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버리게 할 순 없다”는 일갈(一喝)처럼 조조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반동탁(反董卓)연합 와해 후엔 후한(後漢) 13주(州) 중 하나인 서주(徐州)를 사사로이 침공했다가 패하자 무고한 양민들을 까닭 없이 학살했다. 이후엔 보위(保衛)라 쓰고 납치라 읽는 협천자(挾天子)에 나선 뒤, 마지막 한황제 헌제(獻帝)를 제 안방인 허도(許都)에 사실상 감금했다.

 

조조는 제 멋대로 작성한 천자 명의 공문(公文)에 옥새(玉璽) 찍어 남발하면서 이령제후(以令諸侯)했다. 폭발한 헌제가 장인 복완(伏完)과 공모해 역쿠데타 꾸미다 발각되자 복완의 딸이자 국모(國母)인 복황후(伏皇后)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 감히 시해(弑害)했다. 그리고는 제 딸인 조절(曹節)을 새 황후로 앉혀 아예 자기 자신이 국구(國舅) 자리를 꿰찼다.

 

216년에는 400년간 지켜진 고조(高祖) 율법(律法)을 어기고서 헌제를 겁박해 스스로를 위왕(魏王)에 봉했다. 명목상 자신의 봉토(封土)는 업군(鄴郡) 일대 등에 그쳤으나, 조정 안팎이 제 사람 투성이니 (유비‧손권의 땅은 빼고) 후한 전체가 조조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의 영토욕 즉 물욕은 권력욕 못지않게 실로 어마어마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송건(宋建‧?~214) 토벌이다.

 

송건은 184년 양주(凉州) 군벌 한수(韓遂) 등의 반란으로 관서(關西)지방이 혼란해지자 세력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조정 재가 없이 평한왕(平漢王)을 참칭(僭稱)했다. 그런데 조정은 그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는 송건의 영토가 농서군(隴西郡) 언저리에 위치한 부한현(枹罕縣) 즉 일개 마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어디 읍‧리 하나 점거하고서 국무총리‧광역단체장‧국방장관‧합참의장 사칭한 격이다.

 

별다른 부정적 기록이 없는 점 보면 송건은 치국(治國)도 무난히 했던 모양이다. 때문인지 송건은 무려 30년이나 왕 노릇 하며 떵떵거렸다. 조조로서는 현지백성들 안위(安危)를 생각해서라도 인내심 갖고 장기간에 걸쳐 항복을 종용하거나, 자객을 보내 송건 한 사람만 제거할 수 있었다.

 

허나 가진 사람이 더 하다는 말처럼, “내가 황제한테 빼앗을 땅인데 네놈이 먼저 감히” 참을성 없었던 조조는 친척이자 맹장 하후연(夏侯淵)을 보내 ‘시골 깡촌’ 부한현을 깡그리 짓밟아버렸다. 나아가 사람이란 사람은 마치 그 예전 서주 때처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도륙해 씨를 말려버렸다.

 

함정 파고서 반란표 무차별 색출

 

조조에 의한 조정 사조직(私組織)화는 결국 크나큰 저항에 직면했다. 218년 길본(吉本)의 난이 그것이다.

 

길본은 원래 평범한 태의(太醫)였다. 황실‧위왕부(魏王府) 오가며 진맥이나 하면 편안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야망 없는 척, 조조에게 아부하는 척하던 길본은 실은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으로 무장한 충의지사(忠義之士)였다.

 

길본은 경기(耿紀)‧위황(韋晃)‧김의(金禕) 등 선비들과 모의해 거사를 준비했다. 허도에서 반란 일으켜 황제 신병(身柄)을 확보한 뒤, 유비‧관우 등의 군대를 황명(皇命)으로 소환해 역적 조조를 격멸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천하정세는 다음과 같았다. 손권(孫權)은 양주(揚州‧강동) 및 교주(交州‧지금의 베트남 일대) 등을 차지하고서 조조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유비(劉備)는 익주(益州)에 둥지 틀고 앉아 병마(兵馬)를 기르면서 형주(荊州)의 관우(關羽)와 북벌에 나설 날만 기다렸다.

 

헌제는 여전히 허도에 구금 같은 보위 상태였으며, 조조는 위왕으로서 딴 살림 차리고서 업군 동작대(銅雀臺)에서 신선놀음하기 바빴다. 따라서 만약 길본 등의 기습 기의(起義)가 성공한다면 조조로서는 손 쓸 새도 없이 당하기 십상이었다.

 

만약 황궁을 잃은 뒤 무력으로 난을 진압하다가 자칫 헌제가 극단적 선택 등 변고(變故)라도 당한다면, 조조는 “나 황제 죽게 만든 역적이오” 만천하에 광고해 ‘샤이 우국지사(憂國之士)들’ 단합 명분 줄 가능성 컸다. 당장 조조의 오른팔 순욱(荀彧)만 해도 조조를 황제감이 아닌 한나라의 기둥감으로만 여겼다.

 

그렇다고 난을 수수방관했다간 유비‧관우‧손권+샤이군벌들 연합군에게 ‘다구리’ 맞고 멸족(滅族)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조조는 길본의 난 당해에 관우가 후음(侯音) 등 위나라 장수들과 손잡고 ‘단독 북벌’ 나서자 그것마저 당해내지 못해 천도(遷都)를 고려했을 정도였다.

 

조조로선 각자 이익에만 충실할 연합군 내부 분열 즉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최후 수단으로 노려볼 수도 있지만, 황제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유비‧손권을 일사분란히 지휘한다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와 손잡을 개연성이 비교적 높은 손권은, 위‧촉‧오 삼국 지도자 중 가장 늦게 황위(皇位)에 오를 정도로 의의로 한나라 눈치를 많이 봤다.

 

길본 등은 정말로 반기 들고서 마치 대군(大軍)이 봉기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허도 곳곳에 불을 놨다. 조조는 이리해도 죽고 저리해도 죽기에 두통에 머리 싸맸다. 그는 간웅(奸雄)답게 허도에 남겨뒀던 수하 왕필(王必)의 목숨을 대가로 반란을 겨우 진압했다. 길본은 교전 도중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경기 등은 다른 샤이지사들 명단 누출을 막기 위해 자진(自盡)했다.

 

그러자 조조는 ‘반란표’ 색출을 위해 이른바 죽음의 O‧X 퀴즈에 나섰다.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의하면 조조는 난 당시 허도에 있었던 백관(百官)들을 모조리 업군으로 호출했다. 그리고는 “이번 난은 불순분자들이 감히 천자를 해치려고 일으킨 것이다. 불 끄러 나왔던 자는 왼쪽에 서고, 집에 있었던 자는 오른쪽에 서라” 차갑게 명령했다.

 

백관들은 당연히 “반란 진압하러 갔다고 해야지”라며 왼쪽에 섰다. 그러자 조조는 “저놈들이야말로 전부 역적도당(徒黨)”이라며 유무죄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목을 쳐버렸다. 드라마 신삼국(新三國) 및 소설 삼국지연의 등에선 심지어 제 삼남(三男) 조비(曹丕)마저도 “너도 불 끄러 나왔다지” 의심하며 ‘손절’ 직전까지 간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역사에서도 조조는 장남 같은 삼남 대신 오남(五男) 조식(曹植)을 총애하며 한 때 조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을 정도였다.

 

악행으로 말미암아 결국 천하로부터 버림받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로 인해 민주당은 자중지란(自中之亂)에 휩싸였다.

 

본회의 표결 전에 이미 “(찬성표 던지는 민주당 의원은) 정치생명 끊어놓겠다”는 취지로 엄포 놨던 강위원 더민주전국혁신회의 사무총장 등 친명(親明)계는, 거짓말처럼 가결 결과가 나오자 “배신자 색출” 외치며 조조 같은 참람(僭濫)행위에 나서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는 지난 2021년 상습도박 의혹의 아들 관련 입장에서 “대통령 부인은 공적(公的)존재이고 대통령 아들은 성년(成年)인데 사실상 남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근래에는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 책임을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 등 과거 측근·지인에게 덮어씌워 희생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빈 통에 끊임없이 쏟아진 물은 마침내 넘쳐흐르게 된다. 그리곤 마침내 그 하중(荷重)으로 통마저 깨뜨리게 된다. 물은 오갈 데 없이 산산이 흩어진다.

 

현 민주당 주류(主流)의 과욕(過慾) 그리고 천륜(天倫)‧신용(信用)을 저버렸다는 의혹은 그들에게 자충수(自充手)나 다름없다. 조조 시절의 고대는 하향식 지배가 통상적이었지만, 현대는 상향식 정치 즉 당심(黨心)‧민심(民心)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많은 당원‧국민은 주류 행보 지켜보며 약 2000년 전 조조를 떠올리고 있다.

 

조조는 일련의 악행(惡行)들로 인해 오늘날까지 악인(惡人)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가 생존했던 당대(當代)에 쓰여진 책 조만전(曹瞞傳)만 해도 조조를 “혹독하고 잔인하며 (타인을) 속였다” 혹평했다. 지난 2009년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 고릉(高陵)에서 출토된 조조 시신은 안면부가 흉기에 찔리는 등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후대 평가도 악평 일색인 건 마찬가지다. 조조는 “세상이 나를 버릴 수 없게 하겠다” 호언(豪言)했으나 결국 업보(業報)로 인해 영원히 천하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다.

 

이 대표가 무고(無辜)할 수도 있다. 허나 만약 여러 혐의들이 사실이라면, 이를 덮기 위한 색출행위 등이 조조와 같이 두고두고 후세(後世) 입에 오르내리는 건 가히 인과응보(因果應報)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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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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