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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미지 세탁의 힘

오주한

동정표로 이미지세탁 성공한 이들의 숨겨진 과거

李 병원행 당일 영장은 패착 아닌지…與에 한숨만

 

‘美 식민지’ 하와이왕국의 실체

 

‘하와이원주민‧마오리족‧아즈텍‧남미소국(小國)들’ 이들의 공통적 이미지는 제국주의자에게 약탈당한 약자(弱者)다. 그러나 이들의 이면(裏面)에는 끔직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바로 ‘피해자 코스프레(흉내)’ 통한 동정(同情)의 힘으로 완성된 “조작된 피해자” “주적(主敵)보다 더 악독한 가해자였다”는 점이다.

 

훌라춤(Hula dance)‧우쿨렐레(Ukulele) 등으로 대표되는 하와이제도(Hawaiian Islands)는 누구나 알다시피 미국의 50번째 주(州)다. 미국 본토에서 약 3700㎞ 떨어진 이 땅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지금의 대만섬에서 첫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폴리네시아인(Polynesians) 일부는 카누에 의지해 망망대해(茫茫大海) 건너 동남아‧태평양으로 진출했다. 여러 도서(島嶼)에 살던 이들이 약 2000년 전 하와이제도에 당도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학설(學說)이다.

 

허나 이들의 하와이 정착과정은 평화와는 거리 멀었다. 서기 1200년경 타히티에서 출발해 하와이에 상륙한 후발대(後發隊)는 선주민(先住民)들과의 유혈 낭자한 전쟁 벌여 지배계급에 올랐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와이원주민들의 집안싸움‧자결주의(自決主義)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건국(建國) 아버지로 영웅시되는 초대(初代) 하와이왕국(Kingdom of Hawaii) 국왕 카메하메하 1세(Kamehameha I‧생몰연도 1758~1819)는, 외세(外勢)를 적극 끌어들여 동족(同族)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범죄자였다.

 

하와이원주민과 유럽인들 간 최초 조우(遭遇)는 서기 1500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격적으로 섬에 상륙한 이는 ‘함 내 양배추 강제배식(配食)’으로 유명한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1728~1779)이었다.

 

쿡은 1778년 우호의 증표로서 각종 신문물(新文物) 갖고 선원들과 원주민 앞에 섰다. 석기시대(石器時代) 수준을 크게 못 벗어났던 원주민들은 망원경 등 기기묘묘한 물건들에 큰 관심 보였다.

 

카메하메하 1세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하와이의 권력자였으나 통치력은 제도 전체에 미치지 못했다. 쿡의 기록에는 “후발대 후손인 군소(群小) 군장(君長)들이 각 섬에 난립해 통일된 정부가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카메하메하 1세는 쿡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다양한 기술 습득하는 한편 머스킷(Musket‧개량형 화승총) 등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1782년부터 약 1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내전 돌입해, 1795년 카우아이(Kauai)‧니하우(Niihau) 등을 제외한 모든 섬을 유혈(流血)정복하고서 하와이왕국을 세웠다. 상당수 영국선원은 카메하메하 1세의 군사고문(顧問)으로 활동했다. 카우아이 등도 곧 점령됐다.

 

카메하메하 1세 사후(死後) 왕위는 동생 카메하메하 3세가 계승했다. 형제 통치기간에 막대한 양의 백단나무가 청(淸)나라로 수출됐다. 소득 대다수는 국왕들의 의류‧무기‧선박 등 구매에 쓰였다.

 

스페인 탐험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마린(Francisco de Paula Marin) 기록에 의하면, 1835년부터 카우아이섬에서 시작된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Plantation) 소유주는 미국 기업이었다. 이 무렵 경유(鯨油‧고래기름) 찾아 떠난 미국 포경선(捕鯨船)들도 하와이에 기항했다.

 

벌목(伐木)‧플랜테이션이라는 중노동에는 수많은 왕국의 백성들 그리고 이역만리(異域萬里) 끌려온 흑인노예들이 동원됐다. 원주민들은 원래대로라면 그들 자산(資産)인 어업자원의 무차별 남획(濫獲)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원주민 여성들은 목숨 건 오랜 항해 끝에 욕정(欲情)에 굶주린 거친 백인선원들 성범죄에 노출됐다. “약자보호” 등 카메하메하 1세가 제정한 성문법(成文法)은 공수표나 다름없었다.

 

그 사이 역대 국왕들은 배 두드리며 포도주 들이키거나, 마찬가지로 외세 끌어들여 왕위쟁탈전 벌였다. 지금은 외모가 거의 백인화(化)된 왕가 후손들은, 국제적 동정여론 뒤에 숨어 오늘날까지도 지주(地主)계층으로서 하와이사회 상류층에 군림하고 있다.

 

‘백인 압제(壓制)’ 마오리의 가면

 

뉴질랜드 마오리족(Maori) 역사도 하와이왕국과 유사하다. 마오리인들도 하와이원주민과 같은 폴리네시안이다. 다만 독특한 진화(進化) 결과 타 인종에 비해 골격이 크고 근력이 세다.

 

지금은 뉴질랜드 소수민족이지만, 힘값이라도 하듯 마오리족은 매우 호전적(好戰的)이었다. 전신(全身)을 뒤덮는 문신 및 박력 넘치는 전투춤 마오리 하카(Maori haka)는 이들의 트레이드마크다.

 

하카 특유의 과장된 동작은 싸움 없이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함이고, 혀를 내미는 까닭은 “너를 잡아 먹어버리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과거 마오리족은 마나(Mana) 흡수를 위해 생포한 포로로 식인(食人)했다. 마나는 영혼‧기운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오리족은 호주 어보리진(Aborigine)과 함께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희생자’ 쯤으로 여겨지지만, 마오리도 하와이원주민처럼 외세와 야합(野合)해 동족을 도륙한 숨겨진 역사가 있다.

 

1835년 마오리족 일부는 유럽인들로부터 사들인 총‧도끼 등을 들고서 영국선박을 ‘임차(賃借)’해 이웃 체텀제도(Chatham Islands)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촌 격인 수렵채집 민족 모리오리족(Moriori)이 살고 있었다.

 

뭍에 상륙한 마오리족 약 1000명은 사촌들 촌락(村落)으로 쳐들어가 반항하는 자는 모조리 쏴 죽이고 토막 낸 뒤 먹어치웠다. 산 자들은 노예가 돼 끌려갔다. 약 1700명이었던 모리오리 인구는 약 30여년 뒤 ‘101명’으로 줄었다.

 

마오리족은 본가(本家) 내에서도 유럽산 총 들고 싸움 일삼았다. 이를 보다 못한 영국의 중재(仲裁)로 1840년 휴전협정 격인 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이 부락들 간에 체결됐으나, 한 때 10만명 안팎에 달했던 인구는 그 때 이미 5만 이하로 격감(激減)됐다. 그 여파로 뉴질랜드는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렇게 백인들과 공존(共存)해온 오늘날의 마오리족은 “노예들” “피해자”라는 통념(通念)‧오해와 달리 백인‧아시안 못지않은 권리 누리고 있다.

 

마오리어는 뉴질랜드 공용어(公用語)로 인정받고 있고, 인구는 전체(2023년 기준 약 522만) 중 약 15%를 차지한다. 마오리당(Maori Party)은 총선에서 꾸준히 의석을 확보 중이며, 2020년에는 마오리 출신 여성장관이 탄생했고, 지난해에는 마오리 명절 마타리키(Matariki)가 공휴일로 지정됐다. 물론 그럼에도 마오리사회 일각에선 “피해자 목소리가 곧 증거다” 취지의 “더 내놔” 구걸이 끊이지 않는다.

 

아즈텍제국(Aztec Empire)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 방문 이전엔 만만한 이웃부족들 사냥하며 ‘재미로’ 인육(人肉) 즐기던 악마들이었다. “침략자”라던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도리어 먹히기 직전의 포로들 구출하는 상황도 있었다.

 

반미(反美)‧반(反)자본주의를 입에 달고 살며 “우리는 미국‧자본의 노예가 아니다” 부르짖는 칠레‧페루‧볼리비아는, 막대한 ‘자본’ 안겨다 줄 구아노(Guano‧비료로 쓰는 새똥) 둘러싸고 서로의 뒷골 후려갈기는 태평양전쟁(War of the Pacific‧1879~1883) 벌인 바 있다.

 

피해자 흉내로 위기 벗어난 자들의 교훈

 

단식(斷食)인지 소식(小食)‧다이어트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아무튼 대여(對與)투쟁 나섰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교롭게도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 당일 병원에 실려 갔다. 이를 두고 야권(野圈)에서 ‘동정론’ ‘체포동의안 부결 목소리’가 확산된다고 한다. 오늘(19일) 오후 3시30분경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이 대표를 비공개 면담할 예정이다.

 

이러한 기조(基調)는 비단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도 감지된다. 분명 각종 범죄혐의가 있는 건 이 대표임에도, 마치 당대(黨大)가 몰아세운 탓에 이 대표가 열사(烈士)가 되는 듯한 모양새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30% 이하를 기록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뉴스토마토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16~17일 전국 성인 10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19일 공개한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에서 윤 대통령 국정수행 긍정평가는 28.5%로 나타났다. 부정평가는 67.3%였다.

 

중도층에서의 “잘 못한다” 응답은 70.3%였다. 응답자의 42.3%는 “이 대표 체포동의안 국회 제출 시 반대표 던져야 한다” 답했다. “찬성표”는 38.9%였다. 정당별 지지율은 국민의힘 32.0%, 민주당 46.1%, 정의당 3.0%, 지지정당 없음 14.4%였다.

 

이 대표가 피해자 흉내 낸다고 단정 짓는 건 아니나, 우리 대한민국에서 동정표가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동정표의 힘으로 위기를 빠져나간 이들은 적지 않다.

 

이 대표는 다수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고순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윤 대통령 등에 대한 시선은 대체로 반대다(이상 여론조사 상세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의 이 대표 병원행(行) 당일 구속영장 청구는, 세 살 아이 어이마저도 쏙 빼놓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 난무하는 여권(與圈) 패착(敗着)은 아닌지 (누구라고 콕 집어 얘기하는 건 아니지만) 당대 일각은 고찰‧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때문에 돌아오는 건 야당의 피해자 코스프레, 여당의 가해자로의 둔갑(遁甲), 굵직한 차기 선거들에서의 대패(大敗)가 될 가능성 크다. 세 살 아이만도 못한 소수 때문에 또다시 폐당(廢黨) 위기 맞는 건 국민의힘 당원‧지지자가 결단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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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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