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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 이승만 대통령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우남 이승만, 세기를 넘어 세대를 잇다'를 연 가운데 청년 이승만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유산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은 25일 오후 서울 중구에 위치한 크레스트72에서 '조선의 쇠퇴와 청년 이승만'에 대해서 발표했다.
이 교장은 "1910년 8월 29일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합하는 내용의 조칙을 공포했고 조선은 그 뒤로 말그대로 국가 이전의 야만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즉 20세기 한국인들은 그들의 전통 국가와 사회가 해체된 폐허에서 새로운 문명 원리의 국가와 사회를 건립할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서양에서 발원한 근대 문명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로 그의 동포들을 인도했다.
이 교장은 "근대 문명의 핵심 요소는 '개인, 통상, 기독교' 세 가지"라며 "이승만은 이 세 가지 요소의 내용과 상호 관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한 최초의 한국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장은 일제 하에서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물적·인적 자원이 성장했지만 근대 문명 국가를 건립할 정치력을 기대하는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1948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은 어려웠고 세워졌더라도 단명했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쇠퇴한 나머지 허물어진 전통 문명을 새로운 원리로 대체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청년 이승만이 상투를 자른 것은 중화적 세계관과의 단절을 신체적으로 상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장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분분하다는 것도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인품과 지성이 그의 정치를 계몽적 철인정치로 이끌었다"며 "그것은 당대 한국사를 진보의 방향으로 이끈 거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저항의 표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후 김명섭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일전쟁과 이승만'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김 교수는 "조청일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청일전쟁은 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교수는 "당시 조선에서 벌어진 제1차 동학농민봉기, 청군 출병과 전주성 입성, 일본군 출병과 경복궁 입성, 제2차 동학농민봉기 등은 청일전쟁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언급했다.
김 교수는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 청 제국의 세력을 밀어낸 일본의 압박 속에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청년 이승만은 유교 경전 대신 신학문과 민주주의를 접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또 "(이승만 대통령은)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탈중화 독립정신을 키웠다"며 "주어진 독립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청일전쟁 이후 친일의 덫을 피했다"고 평가했다.
이후 김영림 일본 추오대학교 문학박사가 논찬했다.
김 박사는 "6·25 전쟁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주체로서 대한민국의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강인하게 주지시켰다"고 분석했다.
김 박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서도 대한민국 의지가 약소국이란 이유로 강대국들에 의해 함부로 배제되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며 "그 결과 누대에 걸친 혜택과 번영의 초석으로 이어진 안전보장조약까지 이끌어냈다"고 강조했다.
이날 논찬에는 김 박사를 비롯해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복거일 소설가 등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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