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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정치인의 원조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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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홍 조교

1927년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김영삼

 

1934~5년 7,8살 시절 부모님 심부름으로 멸치를 지키다가 어른들이 훔쳐가면

 

"다 큰 어른이 남의 물건을 훔쳐가면 도둑놈이지요!" 라고 꾸짖던 개구쟁이 소년이였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을때는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이라는 꿈을 적어두기도 하던 학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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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김영삼... 

 

김영삼이 23살이 되던해 6.25 전쟁이 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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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 학도의용군에 자진입대했고

 

웅변실력을 인정받아 공보정훈병이 된다.

11월엔 거제도 특별파견대로 국가를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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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 

서울대를 졸업한 김영삼은 웅변을 잘해서 독립운동가 장택상과 가까워지고

장택상은 김영삼을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장택상의 비서로 일하던 김영삼은 장택상이 총리직을 사퇴하자

 

아버지의 만류에도

 

자신의 고향인 거제에 출마하기로 결심했고

 

제 3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1954년 5월 20일 26살5개월의 나이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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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김대중   우 김영삼

 

이승만의 자유당 소속이였지만

 

이승만이 3선제한을 철폐하는것에 반대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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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으로 통과되자 김영삼은 10명의 동지들과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에 입당한다.

※.이당시의 민주당은 더불어민주당과 다른성격을 띄고있다. 실질적인 뿌리는 새정치민주회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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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연설중인 김영삼)

 

 

 

4.19혁명 이후 5대 국회의원에 또 한번 더 당선된 김영삼...

 

 

충격적인 사건을 맞이한다.

 

1960년 9월 25일 무장공비 이정섭(당시 25세)과 윤병윤(당시 47세)이 거제의 고향집을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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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61년에 대밭에 숨어있다가 체포된다)

이당시는 남한의 국력이 너무나 부족해서

북괴들이 해적처럼 노략질을 하곤했다.

북괴는 공작자금을 마련하기위해

선원들에게 줄 월급을 현찰로 가진 김영삼 생가를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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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MLB파크 김영삼 어머니 무장공비에게 돌아가셨다는? 글)

 

김영삼의 어머니에게 총질을 하고 
돈을 갈취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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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어머니 박부연여사)

어머니는 거제도에서 부산까지 응급 이송되었지만

향년 54세의 나이로 결국 사망한다.

이때문에 김영삼은 온건 보수에서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된다.

 

1961년 5.16쿠데타 세력에 김영삼이 함께하길 바랬던 김종필은 김영삼을 설득한다.

“우리 혁명세력과 같이 합시다. 우리와 함께 협력해서 이 나라를 제대로 엮어 나갑시다” 

하지만 김영삼은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습니다. 거기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군정 연장이 발표되자 반대 시위에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출소후 1963년 윤보선,유진산등 민주당 구파들이 모여 민정당을 만들때 함께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정당 -> 민중당 -> 신민당

 

야당은 비록 박정희의 3선 개헌 저지에는 실패했으나,

71년도 대선에서 승리해 박정희 장기집권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었다. 

나는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패배감과 무기력에 젖어 있는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박정희독재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 누군가 이러한 역사적 대임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당 내외를 통틀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겠다.

-김영삼 신민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며-

 

1969년 신민당의 원내대표가 되어 활동하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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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염산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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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개헌에 반대하는 신민당의원들이 회의를 하고있다)

 

1969년 3선개헌에 반대하면서 40대 기수론을 연설하는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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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씨의 3선 개헌 강행을 통해 이러한 위장민주주의의 지향하는 바를 뚜렷이 체감한 우리 야당은 빈사상태에서 헤매는 민주주의를 기사회생 시키는 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명의 시점에 섰습니다.

나는 이 중대하고 심각한 사명의 대열에서 야당의 일원으로서 짙은 의무감과 결단, 그리고 벅찬 희생을 각오하면서 71년 총선거에서 대통령후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외람되나마 사랑하는 당내 동지들과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이렇게 연설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1차에서 지지를 많이 받았지만

 

김대중과 1:1 경선에서 패한 김영삼..

 

75년 자신의 차기 대선을 준비하던 그였지만

 

10월 유신이 일어나면서 일이 꼬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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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

김영삼 은 박정희 정부의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허나 영수회담 이후 선명 노선이 약화되고 김옥선의 관제데모 발언 파동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 당 내부에서 그에 대한 반대가 커져가던 상황

 

1976년 5월 신민당 지도부 선출을 위해 모인자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은 이철승 국회의원을 지지했고

신민당 내에서 세력이 밀리던 이철승은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게 되자,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판을 뒤엎을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바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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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라는 김태촌 조폭들에게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국회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

항복하라는 조폭 김태촌에게 김영삼이 소리친말-

 

경찰에게 신고했으나 경찰은 조폭이 신민당 당사를 점거하도록 내버려두었고

이것은 전국에 생방송된다.

 

이렇게 따로따로 치르게된 경선에서 이철승과 김영삼이 각각 따로따로 총재로 당선되자

분당될 위험에 이충환을 총재대행으로 하여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기로하고

1차에선 김영삼이 앞섰지만 2차에서 이철승에게 밀리게 된다.

 

총재가 된 이철승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운다던지 외신에게 유신체제를 지지한다던지

온건 타협노선을 걸었고 이는 당내 내홍으로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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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중반 연설중인 김영삼)

그리고 1979년 다시 신민당 총재가 된다.

 

 

그리고 같은해 부산마산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는 YH사건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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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정상화를 원하던 여공들이 시위를 하다 신민당 당사에 몰려들어 호소하자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그들의 호소를 듣고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민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킬것이니 걱정마세요

 

라고 말하며 신민당건물을 집회장소로 내어주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이 모든것을 김영삼이 주도한거라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계원과 김재규는 강제해산을 결의했고

검찰 기동대를 보내 폭력을 동원하여 모두 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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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들을 모두 죽이려고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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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적인 처사에 김영삼은 

뉴욕타임즈와 인터뷰 도중

“The time has come for the United States to make a clear choice between basically dictatorial regime,

increasingly alienated from the people, and the majority who aspire to democracy,”

*해석 : 국민들로부터 소외된 소수의 독재 정부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

둘 중 하나를 미국 정부가 선택해서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거다.

https://www.nytimes.com/1979/09/16/archives/foe-of-seoul-regime-asks-decision-by-us-opposition-chief-facing.html

 

저 발언을 심각하게 평가한 4공화국 정부.

신민당 비주류는 이때다 싶었는지 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총재직 직무정지 신청을 제출을 해버리기까지하고...

배신한 신민당 일부와 공화당 그리고 유신정우회는 제명안을 변칙 통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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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된다.

 

 

의원직에서 재명된 김영삼총재는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에 반발하며 신민당 66명과 민주통일당 3명은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했고

공화당과 유정회에서 사퇴서를 선별 수리했다는 소문이 돌게된다.

그렇기에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 경남 지역을 중심을 기반을 둔 국회의원들과

재야 지식인, 학생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곧이어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10.26사건이 일어나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사망하고 

 

전두환이 쿠데타로 그 빈자리를 차지해버린다.

 

이때 그가 한 말이 명언이다.

 

전두환일당은 지역갈등을 부추기기위해 김대중에게 사형을

김영삼에겐 가벼운 자택연금형을 내렸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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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5.18을 일으킨 신군부에 항의하며

 

구속 인사의 전원 석방과 해금, 해직 교수 및 근로자와 제적 학생의 복직, 복교, 복권,

 

언론의 자유, 개헌 및 국보위 제정 법률의 개폐등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신군부에 불리한 기사를 쓸 수 없는 신문사들은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등으로 에둘러 표현한다.

 

 

 

 

전두환은 민심이 악화될까봐 결국 가택연금을 해제했지만

협상은 없다. 난 죽기로 결심했다.

라고 말하며 고집을 꺾지 않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설득에 단식투쟁을 멈춘다.

 

 

그렇게 가택연금을 해제한 후 김영삼은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켜

상도동계를 비롯한 범야권 세력을 모조리 포함시켜서 

 

신한민주당을 만든다.

 

전두환정부는

유성환 의원이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다." 라고 말한것을 트집잡으며 체포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등 

*이것은 국회의원이 국회 내에서 회기 중 발언한 것을 이유로 구속당한 헌정 사상 최초의 사례가 된다.

계속해서 정치 탄압을 가했지만

신한 민주당은 직선제 개헌을 계속해서 주장한다.

 

허나 이 과정에서 5.3 인천항쟁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생겨버리고...

 

이때부터 신한민주당에선 운동권이 너무 과격하다 생각해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1987년 이민우 당총재가 내각제 개헌도 가능하다는 이민우 구상을 내놓자 반발한 김영삼은

 

내각제 반대파들(상도동계,동교동계)와 함께 탈당한뒤 새로운 당을 만드는데

 

개혁보수주의를 내세우는 이 정당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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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민주당이다.

 

 

 

 

그리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임기 5년 내내 하나회 척결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금융실명제를 도입해서 부패정치인과 기업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것도 이때이다.

 

이렇게 민주화에 평생을 투쟁한 김영삼 대통령이였지만

 

군부정권 내내 달려오기만 하면서 누적된 여러 부작용들이

 

하필 김영삼 정부때에 터져버렸고.. (이는 미국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를 ... IMF를 일으킨 대통령으로만 기억하고있다.

 

... 

 

기억하자

 

그는 20대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어

 

평생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고

 

마침내 군부세력을 몰아내는데에 성공하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같이보기]

 

 

ps. 그는 현재 유력한 정치인 대다수를 발굴해 내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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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각 언론사 (사진에 출처표기)

김영삼 기록관 

 

https://www.pa.go.kr/portal/research/interview/interviewDetail.do

 

대통령이 뭐했는지 궁금하다고? 위에 기록관에서 +_+ 볼 수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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