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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생일입니다

국가영도위원회 청꿈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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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카르노(Soekarno)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건축가로, 이름은 바라따유다(Bharatayuddha, भारतयुद्ध)의 등장인물 카르나(Karna, कर्ण)에서 따왔으며, 초명은 꾸스노 소스로디하르조(Koesno Sosrodihardjo)고, 40년대에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에 맞서 인도네시아민족혁명(Revolusi Nasional Indonesia)을 이끈 뒤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1901년 6월 6일,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을 당시 동부자와성(Provinsi Jawa Timur)의 도시 수라바야(Surabaya)의 무슬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 의해 대도시의 명문학교를 다니며 고급교육을 받았고, 교내에서 훗날 독립운동에 참여할 이들과도 학우가 되었는데, 이후 토목공학을 전공해 건축가로 일했고, 그가 건축가로서 터득한 건축 양식은 인도네시아 현대 건축물에 대부분 반영됐습니다.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당국의 식민통치가 가혹해지고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건축가로 일하던 그 또한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27년에는 훗날 인도네시아의 초대 여당이 될 인도네시아민족당(Partai Nasional Indonesia)을 창당해 네덜란드 당국을 맹렬히 비판했으나, 1929년 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반란죄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인도네시아인들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본국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도 이끌어냈으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치자 네덜란드 당국도 얼마 안 가 다음 해에 특별사면으로 그를 풀어줬으며, 덕분에 그는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민족영웅으로 여겨졌고, 그 뒤로도 당원 동지들과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해 네덜란드 당국을 비판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39년 나치독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네덜란드 본국을 점령하고, 1941년 일본이 나치독일과 동맹을 맺고 태평양전쟁(Pacific War)을 일으켜 네덜란드 당국을 몰아내며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그는 1942년에 일본에 의해 옥중 동지들과 풀려났는데, 인도네시아에 수립된 일본군정 역시 네덜란드 당국과 다를 바 없는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으나, 인도네시아에서의 지배체제를 확고하기 위해 그와 그의 동지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본군정에 포섭되어 그 중 한 명인 모하맛 하따(Mohammad Hatta)와 일본으로 가서 당시 일본의 군주인 쇼와천황(昭和天皇)과 만나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치독일과 일본이 연합국에 의해 패망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어 일본군정이 와해되자, 그 해 그는 하따와 함께 8월 17일 중부자까르따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고 다음 날에 각각 초대 정·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연합국에 가담했던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9월 29일 인도네시아를 침공해 학살극을 벌이며 인도네시아민족혁명이 전개됐는데, 초반에는 네덜란드군이 영국의 정규군과 식민지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우세를 점했으나, 인도네시아군의 저항이 거세지고 일본군 패잔병들과 영국 식민지군 탈영병들도 인도네시아군에 합류하며 전세는 네덜란드군이 원하는데로 되지 않았고, 연합국의 지휘국인 미국까지 네덜란드를 압박하면서 1949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완전히 독립합니다.

 

그렇게 독립된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국내로는 그가 고안한 빤짜실라(Pancasila)에 기초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하도록 하고, 국외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아시아주와 아프리카주의 지도자들을 반둥(Bandung)으로 초청해 아아회의(Konferensi Asia–Afrika)를 열어 미국의 서방블록(Western bloc)과 쏘련의 동방블록(Eastern bloc) 그 어느 곳에도 가담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는데, 이는 당시 냉전이 한창인 인도네시아가 외세의 간섭 없이 발전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우선 인도네시아는 태생부터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교근본주의자들이 반외세의 기치 아래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국내로는 외세 없는 상황에서 각자 이념이 다른 이들이 한 데 있으니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국론분열이 돌아갔고, 국외로는 그의 블록 불가담 천명에 자극받은 외세가 뒷공작으로 국론분열을 부채질하면서 그의 재임기간은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그의 동지인 하따마저 부통령을 사임하고, 1957년에는 대통령 암살미수까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그는 1959년에 지도자가 인민을 이끈다는 교도민주주의(Demokrasi terpimpin)를 내세워 자신이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종교근본주의자들을 이끌어가겠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중심의 독재체제를 구축했는데, 이에 인민들이 반발함은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하려는 소수민족들의 무장투쟁은 더 격렬해졌으며, 60년대에는 권위주의가 더욱 강화되어 자신에 대한 암살미수도 여러 번 일어나고, 이웃나라인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충돌 이후 인도네시아를 UN에서 탈퇴시키기까지에 이릅니다.

 

이렇게 정국불안정과 외교적 고립의 위기에 당착한 그는 국내로는 인도네시아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을 포섭하고, 국외로는 김일성(金日成), 모택동(毛澤東), 호지명(Hồ Chí Minh, 胡志明) 등의 공산권 지도자들과 연대하며 대안점을 찾고자 했으나, 1965년 군부 내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정변을 일으키면서 그의 권력도 끝을 다하고 있었고, 1967년 당시 공산정변 진압군 수장인 수하르토(Soeharto) 장군에게 전권을 빼앗긴 채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가택에서 연금된 채로 살다가 1970년 6월 21일 향년 69세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실각 뒤 세워진 수하르토 정권은 그가 만든 빤짜실라의 이념을 이용해 반공독재를 펼치다가 1998년에 민주화 운동으로 붕괴했으며, 이후 문민정권이 들어서야 국부로서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폐 10만루삐아권에는 그와 그의 동지인 하따 전 부통령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정치학자들은 그에게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시킨 건국의 아버지와 독립 후 인도네시아의 국론통합에 실패한 지도자라는 양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한 편, 생전 여성편력이 심했던 그는 10명의 처를 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중 일본인 처인 네모토 나오코(根本七保子)가 제일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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