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티셔츠, 안철수 머그컵 안되는 이유..한국판 '굿즈'는?
유권자가 정치적 지지 또는 반대 의사를 소품이나 배지 같은 상징물에 투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한국에도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있다. 그러나 선거와 관련해선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5월9일 조기대선까지 '문재인 티셔츠'나 '안철수 머그컵'을 만들어 팔면 '쇠고랑'을 차거나 벌금을 문다. 돈을 받지 않고 나눠준대도 마찬가지로 불법이다. 선거제도가 이런 물품(굿즈) 제작을 엄격히 금지하기 때문이다.
◇"금권선거 막자" 반작용, '너무' 엄격해진 선거제도= 공직선거법 제90조는 유세차량 등 법에 허용된 것이 아닌 물품, 광고물 등을 선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설치·착용·진열·판매할 수 없게 했다. 금지기간은 선거일 180일 전부터, 보궐선거라면 선거 실시사유 확정일부터 선거일까지다. 금지대상은 화환·풍선·간판·현수막·애드벌룬·기구류, 그 밖의 광고물이나 시설물, 표찰이나 배지, 후보자를 상징하는 인형이나 마스코트까지 광범위하다.
후보자등록 후 선거운동기간에 돌입하면 규제가 추가된다(선거법 제68조). 후보자 이름이나 기호·상징색·당명이 들어간 옷은 등록된 선거운동원이나 자원봉사자만 입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지자라고 해서 이 옷을 구해서 입거나, 정치인 팬클럽 회원끼리 갖춰 입고 함께 움직이면 불법이다. 어깨띠, 유니폼 착용 및 손팻말 활용도 금지되고 유인물 배포도 극히 제한된다.
2010년 4월 지방선거 전 어느 시민단체가 친환경무상급식 찬성 또는 반대 후보 게시판에 '스티커'를 붙인 행위도 180일 기간 내 시설물 설치금지 조항 위반으로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이런 규제가 과도해 보이지만 나름 이유는 있다. 공직선거법은 1994년 제정됐다. 극심했던 관권·금권선거를 극복하고 돈 안드는 선거를 지향한다는 가치가 시대정신이었다. 자연히 선거관련 물품 제작이나 배포, 판매는 엄격히 제한했다.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비는 일부 효과도 봤다. 그럼에도 '돈선거'를 근절하지 못했다. 정치자금을 터부시, 범죄시하는 여론은 굳어졌다.
◇책, 운동화…한국적 굿즈의 탄생= 이 같은 제도 차이 때문에 한국의 굿즈는 미국과 달리 극히 제한된다. 책 판매 외에 굿즈라고 할 것이 없다.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책은 마치 미국의 티셔츠나 모자처럼 저자에게 인세 수입을 준다. 실제 문재인 민주당 후보 팬들은 지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그가 2012년 정치에 입문하면서 냈던 '운명'(2011) 구매를 선택했다. 일종의 후원금 개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가방(백팩)과 파란 운동화도 있다. 박 시장은 2014년 재선 선거운동에 돌입하면서, 직접 걸어다니며 민심을 듣고 그 내용을 기록하겠다며 백팩에 운동화 차림으로 나섰다. 지지자들 사이에 화제가 됐고 박 시장은 당선 후 새 가방과 운동화를 선물로 받고 미소 지었다. 이는 일종의 팬덤 현상이면서 다가올 굿즈 보편화를 보여준 장면으로 평가된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의 '더더더 머그컵'에서 보듯 이미 정당 로고가 박힌 기념품 제작과 판매가 시작됐다.
굿즈 대신 컬러(색깔)가 강조되기도 한다. 27일 민주당의 호남경선장에는 각각 파랑으로 무장한 문재인팬, 노랑색 안희정팬, 주황색으로 맞춰입은 이재명팬들이 모여 열띤 응원전을 폈다.
◇매체·소품 활용 규제풀고, 선거제도 접근방식도 고민을= 전문가들은 선거제도 개선이 필수라고 말한다. 현행 제도는 오프라인 규제는 강력한데 온라인 규제는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온라인 공간의 폭발적 성장,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깊숙히 들어온 시대와 어긋난다.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 가치를 침해할 가능성도 있다. 많은 국민이 정치적 의사표현이 담긴 옷이나 물건, 연예인이나 정치인을 상징하는 소품을 일상적으로 지니고 다닌다. 그런데 선거기간 이런 물건에 정당이나 후보를 연상시키는 내용이 있다면 금지된다. 결국 광범위한 정치참여의 통로가 되는 '굿즈 정치'가 뿌리내리기 힘들다.
서복경 서강대 교수는 "거리의 손 피켓이 온라인에 캡처돼 돌아다니는데, 피켓은 불법이고 (그걸 담은) 사진은 합법이라는 규제에 어떻게 시민들이 설득되겠는가"라고 꼬집었다. 서 교수는 "금권선거 우려, 시민불편이라는 근거도 현실에 맞지 않다"며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매체·도구에 대한 제한을 풀고 '선거일 180일 전'이라는 등의 정치활동 기간제한도 폐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선거제도의 접근방식 자체를 달리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우리나라 선거법은 포지티브 방식이다. 가능한 것을 법률에 적는 형태라서 '포지티브'라고 부른다. 법률에 정한 것 외에는 기본적으로 금지하므로 어감과는 정반대 뜻이 된다. 반대로 안되는 것만 규정하고, 나머지는 기본적으로 풀어주는 게 네거티브 방식이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을 안되는 것만 엄격하게 금지하고 나머지는 풀어주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며 "현행 선거법은 정치신인의 활동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측면도 있다"고 토로했다.
클린턴 시리얼, 트럼프 화장지, 샌더스 턱받이…기상천외 '정치 굿즈'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힐러리·트럼프 시리얼, 힐러리 병따개, 트럼프 화장지, 대만 차이잉원 총통 캐릭터 /사진=트위터, 아마존 홈페이지, 유튜브 캡처
후보 얼굴이 그려진 배지가 '원조 정치 굿즈'(Goods)쯤 됐다면, 지난해 미 대선을 거치면서는 굿즈의 종류가 급격히 늘었다. 후보자들의 후원금 모금책으로 굿즈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2008년 오바마가 처음 굿즈를 이용해 모금에 나설 무렵엔 지지를 호소하는 '말장난'을 티셔츠에 인쇄하는 것이 대세였다. 버락 오바마와 '락앤롤'을 합친 '버락 앤 롤'로 오바마를 지지하고, '백악관'을 뜻하는 은어 'House'를 이용해 '여자가 있을 곳은 집(House)'이라는 문구로 힐러리를 지지하는 식이었다.
여기에 모자, 열쇠고리, 머그컵 정도가 주로 후보 캠프에서 생산하는 '굿즈'들이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는 티셔츠를 뛰어넘어 대선 후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일상용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힐러리 클린턴 '병따개'다. 입을 벌리고 연설하는 힐러리 캐릭터의 입 부분을 병따개로 만든 10달러(약 1만2000원)짜리 제품은 지지자들 사이 큰 인기를 끌었다.
트럼프 캠프에서는 강아지용 스웨터를 내놨다. 트럼프의 이름과 그의 대표적인 구호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를 새긴 스웨터다. 15달러(1만6000원)짜리 제품은 애견인들 사이 인기를 끌었다. 특히 트럼프는 미국 본토 제작 상품인 것을 강조했다.
버니 샌더스는 '아기 턱받이'를 제작했다. 11달러(1만2000원)짜리 제품에는 '버니를 느껴봐'(Feel the Bern) 등 샌더스의 구호나 '버니를 지지하는 아기'(Babies for Bernie)와 같은 응원 문구가 담겼다. 샌더스를 지지하는 젊은 부부들 사이 아이에게 이 턱받이를 선물하고 함께 사진을 찍어 SNS(사회관계망)에 공유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굿즈들은 각 후보 캠프에서 공식적으로 제작, 판매하는 것들이다. 굿즈의 범위를 일반인들이 후보들의 얼굴을 이용해 제작하는 것까지 넓히면 굿즈의 종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아진다. 콘플레이크와 화장지까지 등장했다.
대선 합동 유세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의 한 유세장 입구에서 청년 사업가들이 힐러리와 트럼프 캐리커처를 포장지에 그린 콘플레이크를 판매했다. 한 상자당 40달러(약 4만5000원)의 고가였지만 지지자들은 가격에 아랑곳않고 각자 지지하는 후보의 시리얼을 집어들었다. 각기 다른 맛이었던 탓에 현지 언론에서는 "매일 아침 우리는 (무엇을 먹을 지) 중요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유머 섞인 보도를 했다.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는 클린턴 화장지, 트럼프 화장지까지 등장했다. 화장지 한 칸마다 후보자들의 얼굴이 그려졌고, 판매자는 "둘 중 한 롤을 골라서 쓰고, 하나는 보관하라"고 광고했다. 두 롤(힐러리+트럼프) 세트에 24달러(약 2만5000원)이었지만, 이 역시 연일 품절 사태를 빚었다.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도 2015년 선거에서 '굿즈'로 큰 효과를 봤다. 당시 캠프에서는 인기 만화 여주인공과 차이잉원의 얼굴 캐리커쳐를 합성한 영상을 배포했다. 단발머리 캐릭터로 재탄생한 차이잉원은 큰 인기를 끌었다.
캐릭터는 3D 인형으로까지 제작돼 대만 중정구 민진당사 내 홍보 기념품 가게에서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그 인기에 힘입어 머그컵, 티셔츠, 모자, 심지어 향수까지 생산되면서 외신들은 "유례없는 젊은 감각"이라고 칭찬했다. 색다른 마케팅과 '굿즈' 생산으로 젊은 유권자들의 정치 참여를 끌어냈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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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금권선거 방지'라는 이유로 선거 굿즈 제작, 배포, 판매를 금지하고 있음.
괜히 정치인들이 선거 전에 책 팔고 출판기념회 여는 게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