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계속해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크고 작은 군사도발을 감행해오던 거란은 결국 1018년, 고려에 3번째 침공을 가하였다. 2차 침공을 가한 지 8년만에 또 다시 두 나라간의 세 번째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거란은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소배압은 당대 최고의 거란 장수이다. 일찍이 몽골족 정벌에 공이 있었고 이후 하북지방에서 송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경험도 있었고 무엇보다 거란의 2차 침공때 강조의 30만 고려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던 이가 바로 소배압이다.
고려는 이에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소배압에 맞섰다. 이는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강감찬은 본래 문관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문관 벼슬을 오래도록 지낸 명재상이었지 무신은 아니었다. 또한 당시 강감찬은 이미 70이 넘은 고령의 나이였다. 강민첨 역시 거란의 2차 침입 때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부원수라는 직책을 맡기에는 젊은 편이었다. 현종으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고려는 이미 거란의 침공에 일찌감치 대비하여 20만 대군을 양성해두었고 이 병사들의 총 지휘관으로 강감찬을 선택한 것이다.
첫 번째 전투
첫 번째 전투는 역시 흥화진에서 일어났다. 1차 침공 때 양규가 거란의 40만 대군을 물리쳤던 바로 그곳이다. 첫 번째 전투는 고려의 대승이었다. 강감찬이 성 밖에 강을 둑으로 막아둔 뒤 기병을 매복시키고 거란군이 그곳을 지나갈 때 막아둔 둑을 풀어 수공을 펼치고 기병으로 급습하여 거란은 꼼짝없이 당했다. 과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펼쳤던 전술과 비슷하다. 이 일화가 워낙 유명해 이것을 귀주대첩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소배압의 판단
하지만 거란군의 기세는 여전했다. 사실 이 때 패배한 병력들은 거란군의 본대가 아니고 정찰병정도의 개념이라고 봐야 적절할 것이다. 소배압은 선봉군들이 전멸하자 다른 계획을 세웠다. 육로를 통해서 성들을 하나하나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산길을 통해 개경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2차 침공때 얻은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한 판단이었다. 2차 침공때처럼 전쟁이 장기화되면 결국 또 거란이 패배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산길을 택하는 것은 기병이 주요 병력인 거란으로서도 상당한 모험수였다. 평생을 초원에서 자라온 유목민족들에게 산은 낯선 곳이었고 체력적으로 큰 부담이 생길 것이 뻔하였다. 그러나 강감찬이 버티고 있는 정면은 더더욱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에 소배압은 산길을 택하는 과감한 판단을 했고 산길을 통해 개경으로 지옥의 행군을 시작하였다. 소배압의 목표는 단 하나, 개경을 함락하고 현종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위기에 빠진 개경
강감찬은 소배압이 산길을 통해 개경으로 향할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강감찬이 이 사실을 알고 개경으로 말머리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으며 소배압은 강감찬보다 한 발 앞서 개경부근에 도착하였다. 개경은 2차 침입때와 같이 큰 위기에 빠졌다.
2번 피난은 없다! 현종의 지혜로운 판단과 목숨걸고 따른 백성들
이미 2차 침입때 나주로 피난을 가며 큰 고초를 겪었던 현종은 이번에도 같은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판단을 했다. 현종은 도망치지 않고 맞서싸웠다. 그 시작이 청야전술이었다. 청야전술은 모든 군수물자, 식량 등을 없애버려 적군이 보급의 한계를 느끼고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현종은 개경 밖의 모든 물자와 식량을 없애버리고 모든 백성들을 개경으로 불러모았다. 산길을 통해 고단한 행군을 해왔던 거란군 입장에서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배압은 전세가 불리해졌음을 느꼇다. 개경은 현종과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방어하고 있었으며 뒤에서는 강감찬의 고려 본대가 돌아오고 있었다. 힘들게 산을 넘어 왔으나 개경 근처에는 식량도 군수물자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황무지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소배압의 마지막 승부수는 정예기병으로 급습하는 것이었다. 거란은 기병의 나라이다. 이 기병을 통해 유목민족들을 정벌하고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으며 송나라마저 벌벌 떨게 했다. 소배압은 정예 기병 300을 선별하여 개경을 급습하려 했다.
이에 맞서 현종은 놀라운 판단을 한다. 개경의 정예 기병 100을 파견하여 거란의 기병을 급습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거란의 300명의 기병은 숫적으로만 봐도 100명의 고려기병보다 3배가 많고 또 당시 거란기병은 동북아시아 최고로 불리던 악명높은 병력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고려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2차 침공때 양규가 7천의 병사로 40만 대군을 수비하고 700명의 정예병으로 거란의 후방을 교란하고 다녔던 것처럼...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하건대 거란의 병사들이 보급의 부족 문제로 상당히 지쳐있던 가운데 고려의 기병이 급습했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되는 승리가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소배압의 후퇴, 그리고 최후의 전투
정예병들을 모두 잃은 소배압은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최대한 많은 병력으로 귀국해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거란으로서는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소배압은 개경을 눈앞에 둔 채 통한의 회군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거란군을 편히 돌아가도록 놔두지 않았다. 이미 3차례 거란의 침공으로 고려는 황폐화되었고 백성들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앞으로 거란이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확실히 해 두어야 했기에 거란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 '최후의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회군하던 소배압은 귀주에서 고려 본대와 정면으로 맞딱드리게 된다. 상대는 역시 고려의 총원수 강감찬이었다! 최후의 전투가 다가온 것이다!
고려역사를 되게 좋아하네
거란의 2차 침입에 관한 글
강민첨의 활약 - https://theyouthdream.com/board_qhWD16/4115188?page=7&category=406498
양규의 활약 - https://theyouthdream.com/board_qhWD16/4343208?page=7&category=406498
ㅊㅊ
ㅊㅊ
고려역사를 되게 좋아하네
사실 아는게 고려사밖에 없어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원래 다 관심있는 역사가 정해져있다
역사연재글 너도 가자
ㅋㅋㅋㅋ 넌 그래도 다양하게 알던데 ㅋㅋ
난 고려사만 가끔 쓸게
아녀 나는 동양사 무지해
동북아사 약 100년을 결정한 전쟁
그렇죠, 이 전쟁이후 동북아에는 몽골이 등장할때까지 평화가 지속됩니다.
고려 현종의 안목!!
강감찬을 발굴하다니
2차침공때도 다 거란에 항복하자할때 유일하게 피난가야한다고 헀던 사람중 한명이 강감찬이라던데..
그런 의견을 낸 강감찬이나, 정확하게 믿고 판단한 현종이나 대단한 사람들이야
서로 손 발이 맞아야지!!
그래야 시너지가 나오는건데
이러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나라는 망테크로 가고 있음
빌어먹을!
우리나라는 현종은 개뿔이고
대통령 후보들이 다 충혜왕급 ㅋㅋㅋㅋ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 강민첨도 대단한 사람인데 잘 안알려져있음
강민첨이 없었다면 2차, 3차 전쟁모두 패배할 확률이 높았음. 글에는 못적었지만 3차 전쟁때도 강민첨이 별동대로 거란의 별동대를 격파하기도 했었다니...
여튼 고려사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음!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