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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공화국 20년사(2): 군부시기

국가영도위원회 청꿈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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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혁명회의와 임시정부.)

 

오정염(Ngô Đình Diệm) 대통령과 그의 친동생이자 정치고문 오정유(Ngô Đình Nhu)가 군부에 살해당한 뒤로, 월남공화국의 정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때문에 군부는 군인혁명회의(Hội đồng Quân nhân Cách mạng)를 발족시켜 오정염 정권 때 부통령으로 있었던 응우옌 응옥 터(Nguyễn Ngọc Thơ, 여담으로 밍 중장의 쿠데타를 예견한 바 있음.)를 수상으로 한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내정개혁에 착수했습니다. 한편 3주 후 미국에서는 케네디(Kenedy) 대통령이 피살당하면서 존슨(Johnson)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여 차기 대통령이 됐고, 따라서 미월관계 또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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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즈엉 반 밍(Dương Văn Minh), 왼쪽이 응우옌 카잉(Nguyễn Khánh).)

 

그러나 군인혁명회의 주석으로 있던 즈엉 반 밍 국가원수는 군인혁명회의를 이끌어 갈 만한 지도력이 부족했고, 오정염 정권이 시도했던 월남의 중립화를 답습하려고 하여 미국 측의 신뢰까지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존슨 행정부는 응우옌 카잉(Nguyễn Khánh) 중장에게 쿠데타를 사주하여 1964년 1월 30일 새벽에 밍을 국가원수직에서 축출하고 카잉을 새 국가원수로 세웠습니다. 카잉 국가원수는 군인혁명회의를 '군사혁명회의(Hội đồng Quân đội Cách mạng)'로 개칭하고 그동안 오정염 정권의 탄압을 받은 국민당(Quốc dân Đảng)과 비천주교인 인사들로 정부를 구성했지만, 카잉 국가원수 본인이 전임 국가원수 밍보다 입지가 더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의 정부도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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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만 사건.)

 

그렇게 카잉 국가원수도 물러나고 응우옌 반 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 국가원수와 응우옌 까오 끼(Nguyễn Cao Kỳ) 수상의 국가영도위원회(Ủy ban Lãnh đạo Quốc gia, 끼 수상이 실세였음.)가 발족될 때까지 총 7번의 정권교체가 일어난 틈에, 1964년 8월 2~4일 미국 함정인 매독스(Maddox)호가 북부월남의 어뢰정에 공격받은 '북부만 사건(Sự kiện Vịnh Bắc Bộ)'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존슨 대통령은 월남땅에 지상군을 파병했고, 롤링썬더(Rolling Thunder) 작전을 비롯한 북폭을 개시하여 그렇게 월남전쟁(Chiến tranh Việt Nam)은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한국, 필리핀, 타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5개국 군대도 미국을 따라 월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월남땅에 군대를 파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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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까오 끼 수상과 응우옌 반 티에우 국가원수 그리고 국가영도위원들과 외국사절들.)

 

그리고 그사이 티에우 국가원수와 끼 수상의 국가영도위원회는 독재정치를 펼치면서도 한 편으로는 토지개혁, 학교신설, 물가통제에 신경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66년 3월 26일, 사이공 불교교단과 중부지역 불교교단의 갈등이 일어나자 끼 수상이 이를 유혈로 진압하여 민심은 분노했습니다. 티에우 국가원수는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민정이양을 약속했고, 다음 해에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끼 수상을 부통령 후보로 해서 (물론 둘 사이에 잡음이 있었지만 어쨌든) 출마해 당선되어 1967년 10월 31일 월남 제2공화국(Đệ Nhị Cộng hòa Việt Nam)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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