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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대왕 유리왕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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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영

  유리왕은 '황조가'의 작자로 알려져 있어 주로 로맨틱한 왕으로 알려져있다. 과연 유리왕이 정말 로맨틱한 왕이었을까? 그리고 주몽을 이은 뛰어난 왕이었을까? 한 번 알아보자

사진 - 대왕의꿈 공식블로그에서 펌

 

유리왕의 왕위계승과정과 배다른 형제들

  유리왕은 주몽이 부여에 있던 시절 예씨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아버지가 부여를 떠났을 때 어머니와 부여에 남겨졌고 나중에 고구려가 건국되면서 예씨와 유리도 고구려로 입성해 유리왕이 태자가 됨으로써 이후 고구려 2대왕이 된다. 유리가 주춧돌 밑에서 아버지의 징표를 찾았다는 설화는 널리 알려져있다.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는 과정이 순탄치많은 않았던거 같다. 당시 주몽은 소서노와 혼인해 소서노의 많은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했고 그녀와 함꼐 비류와 온조 등 여러 아들을 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갑자기 유리가 찾아오면서 왕위계승에 혼란이 생겼다. 주몽은 결국 장자인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고 비류와 온조는 새 나라를 건국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에 나라를 세웠으나 터가 좋지 않아 얼마가지 못하고 망했고 온조는 모두가 잘 알듯이 백제를 건국했다.

 

유리왕의 정치

  순탄치만은 않아보였다. 이때는 고구려의 국력이 그렇게 강할때가 아니기 때문에 우선 외부적으로 북방의 선비족과 계속해서 크고 작은 교전을 벌였고 나중에 복속시키게 된다. 또 부여의 견제도 만만치않아 3대왕인 대무신왕이 부여를 제압할때까지 계속해서 압박을 받게 된다. 

  후계자 문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첫 번째 태자였던 도절이 죽어 해명을 태자로 임명하고 후계자로 선정했는데 아버지와 많은 갈등이 있었던듯하다. 해명은 평소에 용맹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절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황룡국왕이 이 소문을 듣고 화살을 선물로 보냈는데 해명이 고구려의 위세를 보여주기위해 이 화살을 부러트렸다. 이것을 빌미로 유리왕은 고구려의 왕을 부끄럽게 했다는 이유로 해명태자를 자결하게 한다. 잘못을 질책할 수는 있겠지만 자결을 하게 만드는것은 다소 과한 처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평소에 사냥을 좋아하여 신하들과 갈등을 많이 빚었다는 기록도 많다. 특히 개국공신중 한 명인 협보가 사냥을 좋아하는 유리왕을 비판하자 협보를 내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유리왕의 감정적인 판단인지 지배층들간의 갈등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부적으로 상당히 혼란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자문제도 순탄치 않았던듯하다. 송양의 두 딸을 왕후로 맞았는데 첫째 딸 송씨는 일찍 죽었고 차녀인 송씨가 해명태자, 대무신왕, 민중왕 등을 낳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외에 화희와 치희를 후비로 들였는데 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치희가 고향인 전한으로 돌아간 이야기는 '황조가'를 통해 알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나는 '황조가'를 통해 유리왕의 로맨틱한 부분을 느끼기보다는 '사랑한 여인을 챙기지 못한 능력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 및 주관적 견해

  유리왕은 어려운 시기에 즉위하여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선비족을 복속시키며 나름의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러나 평소 사냥을 좋아해 정사를 돌보지 않을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협보 등 신하들간의 갈등이 많았다는 점에서 정치력에서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그리고 해명태자를 자결하게 만들었던 일을 봤을 때 좋은 아버지로 보기도 힘들 것 같다. 또한 화희와 치희의 갈등을 잘 조정하지 못해 치희를 떠나게 만든 점도 로맨티스트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런 점을 종합해봤을 때 유리왕은 다소 부족한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if는 없지만 만약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지 않고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나 온조가 책봉되었다면 역사가 재미있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특히 온조가 책봉되었다면 더욱 재미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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