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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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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중달(仲達)이며,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지금의 河南省 溫縣 招賢鎭) 출신으로,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사마방(司馬防)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魏) 나라의 조조(曹操, 155~220, 武帝로 추존), 조비(曹丕, 文帝 재위 220~226), 조예(曹叡, 明帝 재위 226~239), 조방(曹芳, 哀帝 재위 239~254, 齊王이라고도 함) 등 4대(代)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舞陽侯)에 봉해졌다.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236~290)이 서진(西晉)을 세운 뒤에는 선제(宣帝)로 추존(追尊)되었고, 묘호(廟號)를 고조(高祖)라 하였다.  

후한(後漢) 안제(安帝, 재위 106~125) 때 정서장군(征西將軍)을 지낸 사마균(司馬鈞)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관(高官)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늘 깊이 간직하고 따랐다(服膺儒敎)"고 전해진다. 형인 사마랑(司馬朗)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이른바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마의(司馬懿)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조(曹操)가 이를 듣고 등용하려 했지만 병이 들었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208년(建安 13년) 승상(丞相)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文学掾)으로 삼았고, 그 뒤 그는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조가 위왕(魏王)으로 봉해진 뒤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조비(曹丕)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둔전제(屯田制)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魏)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산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224년에는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226년 조비가 죽자, 조진(曹眞)·진군(陳群)·조휴(曹休) 등과 함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명제(明帝) 조예(曹叡)를 보좌하였다. 231년 조진이 죽은 뒤에는 대장군(大將軍)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이끄는 촉군(蜀軍)의 공격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구검(毌丘倹), 호준(胡遵) 등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요동(遼東) 지역을 위(魏)에 병합하였다. 

239년 명제(明帝)가 임종할 때 조진의 아들인 조상(曹爽,  ?~249)과 함께 애제(哀帝) 조방(曹芳)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전임시키며 군권(軍權)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는 오(呉)의 공격을 물리치며 기병(騎兵)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병이 든 것처럼 꾸미며 은인자중(隱忍自重)하였으나, 249년(正始 10년) 조상(曹爽)이 애제(哀帝)와 함께 고평릉(高平陵)을 방문한 틈을 타서 정변(政變)을 일으켜 조상(曹爽)을 살해하고, 위(魏)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안평군공(安平郡公)에 봉해졌으나, 251년(嘉平 3년)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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