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노르마'는 성악가에게는 어렵지만 관객 입장에서 내용에 집중하면 재미있게 볼 수 있어요.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삼각관계가 등장하고, 우정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죠. 벨리니가 인물의 감정을 음악으로 기막히게 풀어내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오는 26~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노르마'에서 주인공을 맡은 소프라노 여지원(43)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마'를 한국에서 노래할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쁘고 기대돼요"라고 밝혔다.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 기념 오페라 '노르마'는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2016년 선보인 프로덕션이다. 이번 공연은 당시 파격적인 무대로 주목을 받았던 스페인 연출가 알렉스 오예(63)가 함께하며, 세계 무대에서 활동 중인 로베르토 아바도(69)가 지휘봉을 잡았다.
여지원은 이미 연출가 오예와 여러 번 호흡을 맞췄으며, 지휘자 아바도와는 지난 6월 '나비부인'에 갑자기 투입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오예와 아바도는 로마에서 '나비부인'을 공연 중이었는데, 주인공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무대에 설 수 없었다. 당시 바리에서 '오텔로' 공연을 하고 있던 여지원은 오예의 요청을 받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하던 일요일 오전이었어요. 12시쯤 오예 연출이 전화로 와달라고 했어요. 공연이 4시 30분 시작인데 로마까지 자동차로 4시간이 넘는 거리에요. 기차, 비행기가 없어서 택시를 탔는데 4시 40분에 도착했죠. 곧바로 의상을 갈아입고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올라 '초초' 역을 연기했어요. 당시 큰 이슈가 됐던 사건"이라고 회상했다.
벨칸토(고난도의 화려한 초절 기교에 의한 창법) 오페라의 대가 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대표작인 '노르마'는 1832년 12월 26일 밀라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갈리아(옛 프랑스영토)를 무대로 드루이드교 여사제 노르마의 사랑과 배신, 복수와 희생을 그린다. 국내에서의 공연은 국립오페라단의 1988·2009년 이어 세 번째다.
2005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여지원으로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서울 무대는 이번이 두 번째지만 오페라 전막은 처음이다. 2014년 '대구국제오페라축체'에서 '투란도트'의 '류' 역을 연기했고, 2017년 경기도문화의전당 세계유명연주자 시리즈 '무티 베르디 콘서트'에 참여한 바 있다.
여지원은 다른 프로덕션이지만 2019년 이탈리아 라벤나 페스티벌에서 '노르마' 역을 소화했다. "노르마는 한 민족의 종교·정치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을 다 버려야 해요. 하지만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랑의 배신을 겪게 되면서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어요. 이런 감정을 억제하면서 연기하는 게 쉽지 않죠."
'노르마'는 음역대가 다른 4명의 소프라노가 불러야 할 정도의 기교와 음역대가 필요한 곡이어서 좀처럼 무대에 올리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1952년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노르마'에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노래해 새롭게 조명받았다.
"마리아 클라스가 부른 노래는 저에게 기준점이 돼요. 공부를 하다 보면 궁금한 점들이 생겨요. 악보를 보고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예전에 '노르마' 역을 했던 가수들이 어떻게 표현했는지 들어보기도 해요. '이 사람은 노르마였어'하는 가수들이 있는데, 클라스뿐만 아니라 몽세라 카바예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줬어요."
'정결한 여신이여(Casta diva)'는 달의 여신 앞에서 평화를 기원하며 간절히 부르는 노르마의 대표 아리아로,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멜로디의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부족과 종교,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했다.
여지원은 "소프라노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겁이 나는 노래예요. 최소한의 반주에 노래는 길고 제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관객들은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죠. 노르마의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누르고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게 기도하듯 부르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비토리아 여(Vittoria Yeo)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여지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릴 때부터 불리던 세례명으로, '승리'라는 뜻을 가졌다. 여지원은 파르마의 아리고 보이토 국립음악원, 시에나의 키자냐 아카데미 성악전문과정을 마쳤다. 이후 모데냐 음악원에서 불가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89)를 스승으로 만났다. 카바이반스카는 여지원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음악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무명(無名)에 가까웠던 여지원은 이탈리아의 거장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82)에 깜짝 발탁되면서 유명해졌다. 2015년 8월 유럽 대표 클래식음악 축제인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무티가 지휘하는 베르디 오페라 '에르나니'의 주인공 돈나 엘비라로 데뷔했다.
무티는 2013년 라벤나 페스티벌에서 베르디 오페라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여지원의 연습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이 작품의 연출이 무티의 아내인 크리스티나 무티였다. 그녀를 눈여겨 본 무티가 1년 뒤 '에르나니' 오디션을 제안한 것. 여지원은 2017년 베르디 '아이다'의 주역으로 다시 초대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사상 한국인 최초 타이틀 롤을 노래했다.
"베르디 '돈 카를로'의 엘리자벳, 푸치니 '수녀 안젤리카',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등 아직 노래하지 못한 배역이 많아요. 특히, 비올레타는 소프라노라면 누구나 꿈꾸는 역할이에요. 제가 고음 소프라노는 아니라 할 수 있을 지 몰라서 궁금하고 욕심이 나요."
마지막으로 여지원은 "오페라는 언어를 기본으로 하는 문화 장르에요. 제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위주로 활동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맛을 잘 살려서 연기하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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