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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멕시코혁명의 양대 주인공 판초 비야의 생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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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영도위원회 청꿈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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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초 비야(Pancho Villa)는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인물신으로, 멕시코혁명(Revolución Mexicana) 당시 멕시코 북부의 혁명단체인 북부사단(División del Norte)의 사단장이며, 남부의 남부혁명군(Ejército Libertador del Sur)의 사령관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와 함께 멕시코의 양대 주인공 중 하나로, 별명은 북부의 켄타우로스(El Centauro del Norte)입니다.

 

1878년 6월 5일 멕시코 두랑고주(Estado de Durango)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성명은 호세 도로테오 아랑고 아람불라(José Doroteo Arango Arámbula)였고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었는데, 어떤 일(본인 주장에 의하면 16세 때 누이를 강간한 농장주를 살해하고 산속으로 잠적한 일 때문이라고)을 계기로 산적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성명을 프란시스코 비야(Francisco Villa)로 바꿨고, 주로 지주들의 재물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당시 멕시코 국민들에게는 프란시스코의 애칭인 판초(Pancho)로 불렸습니다.

 

이후 산적 생활을 청산하고 연방정부(Gobierno federal)에 반발해 궐기한 혁명군에 입대하며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 Huerta) 장군 휘하에 배속되어 혁명가의 길을 걷는데, 멕시코는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대통령이 개발독재를 펼치고 있었으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중산층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고, 이들은 재야인사 프란시스코 I. 마데로(Francisco I. Madero)를 중심으로 혁명군을 형성해 디아스 대통령과 연방정부를 상대로 혁명을 일으켰는데, 비야 본인은 혁명군의 멕시코 북부 유격부대를, 사파타는 멕시코 남부 유격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이 둘이 이끄는 부대는 디아스 대통령의 노후한 연방군(Ejército Federal)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1911년에 연방군을 굴복시켰고, 디아스 대통령은 마데로가 호랑이를 풀어놓았다고 경고한 뒤 권좌에서 내려와 프랑스 파리로 망명가자, 혁명군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Ciudad de México)로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호와 갑자기 일어난 지진 속에서 권한대행 1명을 거쳐 마데로를 새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비야와 그가 이끄는 북부사단도 정규군에 편입됐으나, 당시 마데로에 의해 국방사무처 장관으로 임명된 우에르타 장군에 의해 암말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다가 마데로에 의해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마데로는 혁명의 원인을 해결하지 못해 비야의 동지인 사파타가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했고, 이를 틈타 1913년 비극의 열흘(Decena Trágica) 동안 미국이 지원한 군사정변에 의해 본인이 지명한 부통령과 함께 암살당했으며, 군사정변의 주모자이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은 권한대행 1명을 거쳐 대통령직을 찬탈해 독재를 펼치자, 혁명군은 마데로의 지지자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와 그의 측근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 장군을 중심으로 재궐기했고, 탈옥한 비야와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했던 사파타도 전장으로 돌아왔으며, 이 둘은 거점인 북부와 남부에서 각각 그 유명한 북부사단과 남부혁명군을 조직하고 우에르타 장군의 연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멕시코 전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으며, 이를 기세로 둘은 1914년 우에르타 장군까지 몰아내고 카란사와 오브레곤 장군도 멕시코시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비야는 카란사파의 실세인 오브레곤 장군과 정권 수립을 놓고 반목했으며, 그 해 생애 처음으로 사파타와 대면해 그와 연합하여 카란사와 오브레곤 장군을 몰아내고 멕시코시에 입성했으나 정권을 획책하지는 않았고, 이를 기회로 오브레곤 장군은 다시 세력을 키워 1915년에 오른팔을 잃으면서까지 비야의 군대를 몰아내고, 카란사 정권을 복고시키며 미국의 승인도 받아내는데, 분노한 비야는 미국 국경지대를 공격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비야를 잡기 위해 존 J. 퍼싱(John J. Pershing)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를 멕시코에 투입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하여 멕시코 국민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하지만 혁명주체들은 혁명이 끝난 뒤를 기점으로 명운이 다하는데, 우선 혁명의 양대 주인공 중 하나인 사파타와 혁명의 최종 승자인 카란사가 차례대로 피살당하고, 그리고 혁명의 또다른 주인공인 비야 본인은 북부사단을 해산시키고 혁명가에서 은퇴해 고향에서 지역 유지로 살아가다가 1923년 7월 20일 오전 8시경 혁명정부 수립 당시 자신이 주지사 권한대행으로 부임했던 치와와주(Estado de Chihuahua)에서 차를 타고 가던 도중 매복해있던 암살자들에게 기관총을 맞고 향년 4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에 많은 멕시코 국민들이 슬퍼했으며, 사후에는 도굴범에 의해 유해 중 머리가 도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혁명의 대열 안에서 그와 대립했던 오브레곤 장군 또한 대통령 재임 도중 피살당하고, 비야의 죽음의 배후로 거론되는 인물이자 혁명군으로 참전한 바 있는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Plutarco Elías Calles)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날 비야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신출귀몰한 명장이자 사파타와 함께 멕시코혁명의 양대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멕시코사 전반에 이름을 남긴 민족영웅으로도 평가받으며, 그의 주무대인 멕시코 북부의 민간신앙에서는 그를 신으로 섬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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