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황제(皇帝明命, Hoàng đế Minh Mạng)는 월남 완조(茹阮, Nhà Nguyễn) 제2대 군주로, 성은 완(阮, Nguyễn)씨고 휘는 복담(福膽, Phúc Đảm), 구휘(古諱)는 복교(福晈, Phúc Kiểu)로 완조 초대 군주 가륭황제(皇帝嘉隆, Hoàng đế Gia Long)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순천고황후(順天高皇后, Thuận Thiên Cao hoàng hậu) 진씨(陳氏, Trần Thị)입니다.
그는 월남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다스린 군주이자 가장 많은 자녀를 둔 군주(황자 78명, 황녀 64명, 도합 142명)로, 재위 동안 완조 군주 중 제일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사후에는 그 치적이 훗날 월남에 독이 되어 현재까지도 월남사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군주로 손꼽힙니다.
여후조(茹黎後, Nhà Hậu) 민제(愍帝, Mẫn Đế) 치세인 1791년 5월 25일, 부황이 황위에 오르기 전 서산조(茹西山, Nhà Tây Sơn)와 전쟁하고 있을 때 부황의 영토인 당중(塘中, Đàng Trong)의 수도 자딩(嘉定, Gia Định)에서 태어났는데, 친형 셋이 모두 전쟁과 병으로 일찍 죽자 궁내에서는 그와 저이(儲貳)였던 맏형의 맏아들 중 누가 새 저이로 책봉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당시 공신 여문열(黎文悅, Lê Văn Duyệt) 장군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황에 의해 새 저이로 책봉됐습니다.
이후 부황이 서산조를 무너뜨리고 월남을 통일해 황위에 올라 완조를 열고 월남을 다스리다 1820년 2월에 승하하자, 이 달 14일에 황위를 계승해 치세를 열었는데, 국내로는 토지를 개혁하고 쌀 생산량을 늘렸으며, 유학을 발전시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부패관리를 엄벌에 처했으며, 국외로는 청(淸)나라의 각종 제도를 도입하였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땅 대부분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월남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립하고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동화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섬라(태국)와 동남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열강과 교역하며 증기기관차를 비롯한 근대식 문물들을 도입하는 등 완조 군주 중 제일 많은 치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어두운 면도 있었는데, 우선 자신의 정적인 여문열 장군의 일족을 박해서 그의 양자가 반란을 일키는 원인을 제공했으며, 그 외에도 가혹한 통치로 인해 월남 각 지방에서도 민란이 일어나고 점령지인 캄보디아에서도 현지인들이 들고 일어나는 등 그의 치세는 완조 군주 중 제일 반란이 잦았고, 프랑스와의 교역에서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월남땅으로 선교하러 오자 그들을 잔인하게 처형해 프랑스가 월남을 침략할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때문에 현대 월남사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그를 월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게 한 원흉으로 지목해 악평을 남기지만, 최근에는 월남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월남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룩한 군주라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어 월남사학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호오가 엇갈리는 편입니다.
사족으로 그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고려인삼을 좋아했으며, 그가 살인적인 정무를 거뜬하게 처리하고 43명의 처와 관계를 가져 142명의 자녀를 둔 건 고려인삼 덕분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때문에 그는 후대에서 정력의 상징으로도 여겨져 그의 연호를 딴 정력 증진용 탕인 명명탕(明命湯, Minh Mạng thang)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관광객들에게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