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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대왕 투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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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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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 부동산대재벌 광개토대왕(긍정적으로 영토뽕 취하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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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직접창제(자기 아들대리고) 완성 1443년, 반포 1446년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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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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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이 없습니다.
  • 전향자<span class=Best" />
    전향자Best
    2021.11.21

    종모법이 노비의 수를 늘렸다는 건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대주의는 당시 조선이 가져야 할 필수외교이고요.

    세종은 비교불가의 압도적 군주입니다.

    간단한 사례로 조선왕조500년 내내 세종시절의 토지생산력을 따라 잡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치세에 그림자가 존재할지라도 공의 압도적 크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상 제 생각이었습니다.

  • 홍까지마<span class=Best" />
    2021.11.21

    보론

    0.

    기본적으로 역사적 이해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보게되면 모든게 미개해보일 뿐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없음.

     

     

    1. <<명.청 교체 시기에도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며 국운이 다한 명을 따른다는 외교정책은 어불성설임. >>

     

    구체적 내용은 전향자님이 잘 설명하신듯. 따라서 생략

     

     

     

    2. <<사대부의 눈치를 보다 애비 태종이 시행한 종부법을 폐지 하고 종모법을 시행한 점에서 세종은 압도적 군주라고 볼수 없음. >>

     

    세종에 대한 각자의 평가는 존중함. 그러나 종모법을 단순히 "노비 늘리는 것은 좋지않아"는 역시 현재의 가치기준에서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함.

     

    당시 조선전기 사회는 노비를 필요로 하던 사회였음. 그 당시 농업생산 방식이 노비를 이용한 "작개제"가 기본이었음. 병작제가 보편화된 것은 그 후라는 점.

    따라서 그 당시 노비의 수를 국가가 적절하게 조절했어야 했고, 세종도 그에 입각했을 뿐임.

     

     

     

    3. <<농업 생산량도 숙종때2200만석 세종때 630만석임. 경작지는 (세종이 170만결 숙종이140만결) 더 많음에도 숙종이 압도적임.>>

     

    이것은 단순 수치로 비교할 게 아님.

    세종과 숙종 사이의 시간적 텀이 근 300년임.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사회적 발전이 있었음. 대표적인 예로 농업기술 발전, 비료 등등.

     

    단순 "숙종2200만석, 세종 630만석, 숙종이 더 많네"는 너무 수많은 요인을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함.

  • 쿄쿄쿄
    2021.11.21

    세종대왕은.. 한글창제 말고는 그닥 아님? 노비종모법으로 조선백성을 노비의 나라로 만든 개새끼일텐데..사대주의 국가체제도 정립시키고 기생제도도..정립함.

  • 쿄쿄쿄
    정치와법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한글말고도 음악과 과학분야에 관심을 가졌다고 알고있습니다

  • 정치와법
    쿄쿄쿄
    2021.11.21
    @정치와법 님에게 보내는 답글

    르네상스시대랑 비교하고 말해.. 측우기..그 어설픈게 ..난 대단한건지 모르겠음.. 뭐 관심은 가졌겠지만 갠적으로 대단한 업적이라곤 말못하겠음.

  • 쿄쿄쿄
    전향자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종모법이 노비의 수를 늘렸다는 건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대주의는 당시 조선이 가져야 할 필수외교이고요.

    세종은 비교불가의 압도적 군주입니다.

    간단한 사례로 조선왕조500년 내내 세종시절의 토지생산력을 따라 잡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치세에 그림자가 존재할지라도 공의 압도적 크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상 제 생각이었습니다.

  • 전향자
    쿄쿄쿄
    2021.11.21
    @전향자 님에게 보내는 답글

    사대주의가 조선이 가져야할 필수 외교는 말이 안됨. 명.청 교체 시기에도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며 국운이 다한 명을 따른다는 외교정책은 어불성설임. 압도적 군주는 태종.숙종이라 생각함. 특히 숙종은 붕당정치를 뒤엎는 환국정책을 펼치는 점에서 그렇다 생각함. 사대부의 눈치를 보다 애비 태종이 시행한 종부법을 폐지 하고 종모법을 시행한 점에서 세종은 압도적 군주라고 볼수 없음. 농업 생산량도 숙종때2200만석 세종때 630만석임. 경작지는 (세종이 170만결 숙종이140만결) 더 많음에도 숙종이 압도적임.

  • 쿄쿄쿄
    전향자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1. 일단 제가 실수를 인정하겠습니다. 단순 토지 생산력이 아니라 경작 면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사과드립니다.

    2. 사대주의는 조선왕조의 외교방침이 맞습니다. 또한, 이때 사대주의는 대국에 대한 일방적인 종속이 아니라 국제적 관례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조선이 명에게 내정간섭 따위를 받은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청에게도 사대를 했습니다.

    3. 명청교체기에 명을 따른다는 외교정책을 언급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논쟁이 지속하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명은 만주족이 아니라 내부 반란세력인 이자성이 멸망시켰습니다. 만주족은 명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이기긴 했으나 명의 국운을 흔들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산해관을 제대로 넘지 못했고요.

    당시 명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명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만주족은 요동까지 확보했을 뿐입니다. 조선의 대신들 역시 만주족에게 사신을 보내어 '귀국의 국력이 아무리 강성할지라도 요동에 국한되어 있는데 중원을 가진 명을 이긴다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언급했습니다.

    4. 명에 대한 일방적인 존화주의가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조선의 외교방침의 문제가 아니라 인조 정권의 무능함이 일차적 원인이라고 볼 뿐입니다. 실제로 광해군이나 인조의 대북 정책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걸 컨트롤 하는 사령탑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5. 끝으로 종모법이나 종부법의 택일에서 쿄쿄쿄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이 '노비계층의 확대' 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걸 모르고 반론을 제기하면 너무 광범위하게 토론이 이뤄질 거 같아서요. 답변 주시면 관련해서 저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즐거운 토론이네요.

    감사합니다.

  • 전향자
    쿄쿄쿄
    2021.11.21
    @전향자 님에게 보내는 답글

    뭐 그만 여기까지 하죠. 여기가 일베도 아니고.ㅋ 근데 조선의 내정 간섭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네요..고명주청 부분이 있어 그렇습니다.갠적으로 노비종모법은 노비계층의 확대가 맞다고 봅니다. 뭐 서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니까 여기까지 하시죠.

  • 쿄쿄쿄
    전향자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앗!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역사 토론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없다보니 쿄쿄님의 답변을 보고 모처럼 즐거웠는데 아쉽네요.

    앞으로도 좋은 의견 즐겁게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쿄쿄쿄
    전향자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근데 일베는 갑자기 왜 나온 걸까요?

    죄송합니다ㅠㅠ

    커뮤니티마다의 사정을 제가 잘 몰라서요.

  • 전향자
    쿄쿄쿄
    2021.11.21
    @전향자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 아.. 일베가 예전에 이런 논쟁 붙으면 밤새 팩트찾아가며 싸우는 곳이였거든요.. 좌파들 어거지를 깨부수려면 팩트를 제시할수 밖에 없어서.. 그 버릇이ㅜ좀 남아 있어서..무의식중에 나온 말임.. 신경쓰지 마세여..

  • 쿄쿄쿄
    전향자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아ㅋㅋㅋㅋ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 전향자
    쿄쿄쿄
    2021.11.21
    @전향자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 진짜 예전에 4대강 광우병 선동 깨부술때 밤새 자료찾고 댓글달고 잼있었는데.. 담에 또 재밌는 이야기 하고 굿밤 되세요!

  • 전향자
    홍까지마
    2021.11.21
    @전향자 님에게 보내는 답글

    보론

    0.

    기본적으로 역사적 이해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를 보게되면 모든게 미개해보일 뿐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없음.

     

     

    1. <<명.청 교체 시기에도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며 국운이 다한 명을 따른다는 외교정책은 어불성설임. >>

     

    구체적 내용은 전향자님이 잘 설명하신듯. 따라서 생략

     

     

     

    2. <<사대부의 눈치를 보다 애비 태종이 시행한 종부법을 폐지 하고 종모법을 시행한 점에서 세종은 압도적 군주라고 볼수 없음. >>

     

    세종에 대한 각자의 평가는 존중함. 그러나 종모법을 단순히 "노비 늘리는 것은 좋지않아"는 역시 현재의 가치기준에서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함.

     

    당시 조선전기 사회는 노비를 필요로 하던 사회였음. 그 당시 농업생산 방식이 노비를 이용한 "작개제"가 기본이었음. 병작제가 보편화된 것은 그 후라는 점.

    따라서 그 당시 노비의 수를 국가가 적절하게 조절했어야 했고, 세종도 그에 입각했을 뿐임.

     

     

     

    3. <<농업 생산량도 숙종때2200만석 세종때 630만석임. 경작지는 (세종이 170만결 숙종이140만결) 더 많음에도 숙종이 압도적임.>>

     

    이것은 단순 수치로 비교할 게 아님.

    세종과 숙종 사이의 시간적 텀이 근 300년임.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사회적 발전이 있었음. 대표적인 예로 농업기술 발전, 비료 등등.

     

    단순 "숙종2200만석, 세종 630만석, 숙종이 더 많네"는 너무 수많은 요인을 간과한 것이라고 생각함.

  • 홍까지마
    전향자
    2021.11.21
    @홍까지마 님에게 보내는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만, 3번의 경우는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습니다.

    세종 시절 경작지가 압도적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 실수로 토지 생산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위와 같은 답변을 하신 거 같습니다.

  • 홍까지마
    쿄쿄쿄
    2021.11.21
    @홍까지마 님에게 보내는 답글

    뭐 님 주장도 맞는 말이지만 갠적으로 농업생산량 수치만 보면 그렇다는 거임. 후대 성군 정조때도 저 수치를 넘기지 못했음. 그리고 조선 전기가 노비를 필요한 사회는 아니었다고 봄. 조선전기 노비 비율은 낮았고 태종은 종부법으로 노비 비율을 더 낮출 계획이었음. 양인이 늘어나야 재정수입도 늘어남.하지만 세종때 양반 지주계급이 여종을 많이 소유한것에 대한 불만을 핑계로 종모법 시행 주장함.그리고 시행후 후기에 노비비율이 10%에서 40% 됐다고 봄. 조선시대 왕들의 재정수입면에서는 종부법이 유리하다 생각함 사대부 입장에서는 종모법이 부의 축척에 유리하다고 생긱함. 뭐 다 보는 기준이 다르니 누가 맞다는건 아니예요..

  • 쿄쿄쿄
    홍까지마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1.<< 그리고 조선 전기가 노비를 필요한 사회는 아니었다고 봄.>>

     

    동의하기 힘듦. 당시 주된 농업경영 형태인 '작개' 바치고 있는게 노비임(가작도 있긴함). 국가재정을 유의미하게 받치고 있다라는 말씀. 그리고 당시 양반의 현업들이 노비의 지탱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

     (노비가 정령 필요없었다면 국가시스템적으로 노비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

     

     

    2. <<태종은 종부법으로 노비 비율을 더 낮출 계획이었음. 양인이 늘어나야 재정수입도 늘어남>>

     

    일반적으로 맞는말이긴 함. 그러나 너무 일반적인 말임.

     

    저 말의 반대말은 "노비가 줄어 그들이 지불하는 신공, 노동력이 감소"와 같은 말임.

     

    그래서 양인과 노비 수가 적절하게 유지되어야 했음.(너무 많아도 문제, 너무 적어도 문제)

     

     ※ 여기서 '적절하다'의 의미는 단순히 몇대몇이 라는 비율이 아니라, 당시 조선이 이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수치를 의미.

     

     

    3. <<시행후 후기에 노비비율이 10%에서 40% 됐다고 봄.>>

    (종모법 때문에 조선후기에 노비비율이 40퍼센트가 되었다고 이해함)

     

    ● (세종의) 종모법 때문에 위와같이 되었다는 것은 납득 불가.

     

    영조때 노비종모법으로 확정나기전 까지 조선후기에도 종부법, 종모법이 존폐를 거듭함.

     

    도저히 세종의 종모법이 얼마나의 인과성을 지니는지 증명불가하다고 생각함.

     

     

    ● 수치자체에 대한 의문.

    일단 현재 조선 호적 연구자체가 불완전한데,

    저런 수치는 조심히 접근해야함.

     

     

     

     

     

    4. <<조선시대 왕들의 재정수입면에서는 종부법이 유리하다 생각함 사대부 입장에서는 종모법이 부의 축척에 유리하다고 생긱함.>>

     

    죄송한데, 이건 무슨말인지 이해를 못하겠음.

  • 홍까지마
    쿄쿄쿄
    2021.11.21
    @홍까지마 님에게 보내는 답글

    뭐 의견이 다를수 있는데.. 종부법으로 태종때 양인이 늘어나 재정 수입이 늘어남 이건 팩트임.그리고 종부법 시행은 태종 세종 세조때 말고 조선 후기에는 없는걸로 아는데요.. 태종때 종부법.세종때 종부법에서 종모법으로 ,세조때 종부법 ,성종때 다시 종모법으로 아닌가요? 작개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국가재정에 유의미하게 받치고 있었던건 아니라고 봄. 작개지에서 나온것이 온전히 상전의 몫으로 바쳐야 됐기 때문임.국가에 바치는게 아님. 즉 노비를 늘여 작개.가작은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이 안됐던 걸로 생각 되요.

  • 쿄쿄쿄
    홍까지마
    2021.11.22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1. 종모법, 종부법 존폐 관련(한국문화민족대백과 참조)

     

    1669년(현종 10) 당시 서인(西人) 집권층은 양역인구의 증가책으로 이 경우의 소생자녀에게 종모법을 적용해 종량시켰다. 반면 반대파 남인은 노(奴)·주(主)간의 분쟁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후 서인과 남인의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종량과 환천(還賤)이 번복되었다.

     

    노의 양처소생에 대해 1669년에는 종량, 1679년(숙종 5)에 환천, 다시 1684년에는 종량, 1689년에 환천 등으로 되풀이되다가 1731년(영조 7)에는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2. 작개, 가작 관련 (신편한국사 참조)

     

     

    16세기에는 이른바 農莊이라고 불리는 지주지는 여러 가지 형태로 경영되었다. 먼저 지주 자신 또는 그 대리인이 노비 등 예속인을 동원하여 농장을 직영하는 형태가 있었다. 이는 지주에게 편리하게 주로 지주가 근처를 경영하였으므로 家作經營이라고 하였다. 또한 노비에게 일정한 토지를 분급하고 책임을 지워 경작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이렇게 분급된 토지를 作介地라고 하는데 이는 노비의 身貢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거둬들인 수확량의 거의 전부가 지주에게 수취되었다. 그러나 노비의 家戶勞動力을 이용한 소경영의 형태라는 점에서 직영과는 차이가 있다.

     

     이들 노비는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경영을 맡은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私耕地를 대여받기도 하였다. 여기서 거둬들인 수확물은 노비들의 몫이었다. 특히 사경지는 작개지와 짝이 되어 이 시기 농장을 경영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3. 노비가됬는 양인이 됬든 경작하면 거기서 세금이 나오니깐 국가 재정을 지탱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홍까지마
    쿄쿄쿄
    2021.11.22
    @홍까지마 님에게 보내는 답글

    네~ 저 탈퇴 합니다. 저는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싶었는데 진성 홍지지자인 제가 예전일베유저였단 이유로 친일파 윤지지자라 매도 당하네요... 여기도 편가르고 다를바 없군요. ..오늘 재밌었습니다..

  • 쿄쿄쿄
    홍까지마
    2021.11.22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ㅠㅠ 아쉽네요. 간만에 좋은 토론 했습니다.

     

    홍 말대로 돌고돌아 다시 만날수 있기를

     

    고생했습니다

  • 홍까지마
    쿄쿄쿄
    2021.11.22
    @홍까지마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 저도 이런게 재밌는데 누구는 제가 역사왜곡에 친일파 윤지지자라고 해서.ㅋ 고렙 달았다고 대들지 말랍디다.ㅋㅋ 잘 계시고 후보교체 기원하고 무대홍!

  • 쿄쿄쿄
    전향자
    2021.11.22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아이고ㅜㅜ

    아쉽네요.

    저도 즐거운 토론해서 즐거웠습니다.

  • 쿄쿄쿄
    줄서맨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https://namu.wiki/w/%EC%84%B8%EC%A2%85(%EC%A1%B0%EC%84%A0)/%EC%8B%A4%EC%B1%85?from=%EB%85%B8%EB%B9%84%EC%A2%85%EB%AA%A8%EB%B2%95#fn-27

     

    노비종모법은 요단락만 읽어도 이영훈이 말하는 세종개새끼랑은 억만광년 떨어져 있음.

  • 줄서맨
    홍까지마
    2021.11.21
    @줄서맨 님에게 보내는 답글

    동의.

    이영훈말은 적절히 걸러 들어야함

  • 줄서맨
    쿄쿄쿄
    2021.11.21
    @줄서맨 님에게 보내는 답글

    결론은 노비 늘어남. 제대로 알고 퍼와.

  • 쿄쿄쿄
    줄서맨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글 제대로 읽은 거 맞음? 아니면 이게 확증편향이라는 건가;;;

  • 줄서맨
    쿄쿄쿄
    2021.11.21
    @줄서맨 님에게 보내는 답글

    응 제대로 읽었어. 노비종모법은 노비를 늘이기 위한 법체계야.. 태종이 실시했던 종부법을 폐지 하고 시행한거.. 종부법이였음 유지되거나 노비가 줄어듬 . 고려시대때만해도 노비 비율이10%가 안됐지만 조선시대 종모법 이후 노비가 인구의40%까지 늘어남..그리고 동북아 3국중 노비제를 유지 늘이는데 힘쓴 나라는 조선뿐이야..그리고 젤 잔인한건 동족을 노비로 했다는거지.. 이민족을 노비로 한것도 용서 할수 없지만 동족을 노비로 세습되게 하고 늘이는 정책을 쓴건 잘못된거야.. 숫자와 비율은 거짓말 안한다..

  • 쿄쿄쿄
    궁예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종모법 이후 인구의 40% 가 노비라는것도 날조 조선은 양인이 세금과 각종역을 담당하는 나라였음 노비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항상 조선정부는 재정난에 시달림 인구의 40%가 노비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지가 안된다 조선 노비의수가 급증했던 시기가 더러 있긴함 그중에 40%정도가 노비였던 시기도 있었고 그런데 세종이후 쭈욱 40%가 유지됐다? 말도안돼는 날조고 그런기록자체가 없음.... 조선시대 노비제도는 시대에따라서 변화했고 오히려 후대로 갈수록 수가 줄어든다. 17~18세기무렵에는 공노비제도 자체를 없에버린나라가 조선임 그리고 노비의 거래도 서양이나 기타 노예제국가마냥 마음껏 사고파는게 불가능했음.. 대부분 상속만한거지... 그래서 노비가 말보다 비싸다라는 말이 있는거임 역사공부하려면 수박 겉핡기로 공부하지 말자

  • 쿄쿄쿄
    아르미니우스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고려부터 이어져내려온 부분이긴한데

    공노비/사노비는 그당시 신분제 사회인거 감안해야되지 않을까?

    안그래도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국가인데 유교/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게 되면.. 국가가 엄청 혼란스럽겠지 세계사적으로도

    농노나 노예들은 어디에서나 있었으니.. 프랑스 혁명전까진 인간의 자유와 인권에 대해 확립이 안됐으니까.

     

    사대주의는 어떻게 보면 굴욕이지만 명나라/청나라 같은 강대국과 국경에 딱 붙어있는 상황에 전쟁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아.

     

    기생제도에 대해선 사람마다 의견이 나뉠 것 같애.

    그나마 세종집권 당시 국가가 안정화 됬기 때문에 대외원정도 가능했던거니까.

  • 아르미니우스
    쿄쿄쿄
    2021.11.21
    @아르미니우스 님에게 보내는 답글

    노비종모법은 노비를 늘이기 위한 법체계야..

  • 쿄쿄쿄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알아듣지도 못한 병신한테 말로 하면 뭐함? ㅋㅋ 고렙을 케이 사진으로 단 병신.ㅋㅋ

  • 쿄쿄쿄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이런 병신이 예전에 문재인 찍고 물고 빨았겠지.ㅋㅋ 좃병신새낔ㅋㅋ

  • 쿄쿄쿄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 개병신 좃같으면 팩트로 써보든지? 병신짤로같은 케이 사진 올려 고렙달면 단줄 아는 좃병신새끼.ㅋㅋ

  • 쿄쿄쿄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병신 부정선거 말도 한적 없는데 혼자 상상딸을 치고 지랄이네.ㅋ 병신새끼 뒤져랔ㅋㅋ 고렙달고 완정질이냐? ㅋㅋ 개병신새끼.ㅋ

  • 전향자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두 분다 진정하세요.

    왜 이러세요.

    즐거운 토론 자리에서ㅠㅠ

  • 쿄쿄쿄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뭔 내용인지 설명해도 모르지? 병신 애미뒤질 새끼. 아주 이래서 잼민이 컨셉 상대하기 좃같음.ㅋ 좃같이 욕질 하니까 좃같이 욕처먹지 개병신새끼얔 ㅋㅋ

  • 쿄쿄쿄
    2021.11.21
    @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 너같이 렙 올릴 맘 없어~병신아 ㅋㅋ 넌 사회활동도 없이 죙일 여기서 병신글 올리고 짤올리고 렙업 하잖어~ 그게 좋아 좃븅신새끼얔ㅋㅋ

  • 쿄쿄쿄
    소비에트행동대장준표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케인 사진 올렸다는 이유로 개지랄임?? 그러면 쿄쿄쿄는 먼 씹덕같은 애니 프사같은마냥 방구석에서 애니만 쳐 보고있을법한 히키코모리형 독거노인 같이 행동을 하시면 쓰나

  • 쿄쿄쿄
    궁예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조선시대를 껍데기로만 알고있으면 이런말하기쉬움...  노비제 노예제의 차이 부터 제대로 알고와라 그리고 사대는 조선초부터 확립된 체계이고 오히려 세종은 조선만의 역법 문자 음악을 만들면서 독자문화를 확산시킨왕임 그리고 중국의 내정간섭도 외교적으로 막았고...

  • 소비에트행동대장준표
    @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아니 먼상황이냐??

  • 궁예
    쿄쿄쿄
    2021.11.21
    @궁예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 노비제와 노예제의 차이? 어이가 없네. ㅋㅋ너나 알아보고 씨부려. ㅋ사대 주의는 어느 시대나 있었고 조선 건국시에도 있었지만 틀을 정립한건 세종이었단걸 말하는건데 뭔 껍데기 드립치고 지랄함?

  • 쿄쿄쿄
    궁예
    2021.11.22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조선시대 신분제는 양천제임 법상 양민과 천민으로만 구분되었고 노비는 천민에 포함되는 신분이고 일단 백성이라는 틀에 확고하게 포함됨 노예마냥 죽어라 수탈할수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라는말임 농노에 가까운 신분이었지 그래서 노비제와 노예제는 확고하게 다른거고 노비는 노예랑 다르게 재산권이 존재했고 상속 증여다 했다. 주인에게 일정분량의 세금만 내면 잉여생산물은 노비에게 권리가 있었음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보면 주인과 재산문제때문에 나오는 민사소송이 빈번하게 나옴 주인이 노비 재산 뺏어먹으려고 하는게 대부분이었지만 노예마냥 강제로 못뺐었다 이거임 그리고 드라마에서 나오는거 마냥 사사롭게 노비주가 노비를 처벌할수도 없었음 노비가 죽거나 다친다 그거 살인 폭행이랑 같은거 위에도 말했다 싶이 노비도 백성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런거 전세계 어떤 노예가 법의 보호를 받냐? 심지어 노비의 매매는 관의 허가가 필요한일이었음 허가조차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노비가격이 말모다 비쌌다는 말이 이런이유때문에 나온거 인구의40%가 노비인데 어떻게 말보다 비쌋겠냐 매매가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랬던거임

    그리고 세종이 시스탬화했다는 사대 너 조선초역사는 아냐? 명이 심심하면 처들어온다고 협박질하고 심심하면 공물보내라 뭐해라 깽판 ㅈㄹ침 그것때문에 손실히 심했다.그걸 세종이 안정화 시킨거임 오히려 세종이 사대의 틀을 짜고난뒤부터 명의 간섭이 완전히 줄고 군사력 대대적으로 투입해서 영토까지 확고하게 늘림 이거 사대 제대로 안했으면 명이 가만있었을거 같냐? 오히려 여진들 꼬득여서 변방 계속 흔들고 외교적으로도 압박 엄청했을거다. 오히려 그당시 세종이 명에취했던 외교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볼수있음 후대에 제조지은 하자고 청에 털리면서까지 명 빨아댄건 그 후대놈들이 병신짓거리 한거지 그것까지 세종탓을 하는건 진짜 역사에 무지한거

  • 궁예
    홍까지마
    2021.11.22
    @궁예 님에게 보내는 답글

    동의.

  • 쿄쿄쿄
    무휼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ㅋㅋㅋㅋㅋ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쿄쿄쿄
    청꿈이
    2021.11.21
    @쿄쿄쿄 님에게 보내는 답글

    저도 세종을 그리 칭송하지 않습니다

  • 청꿈이
    무휼
    2021.11.21
    @청꿈이 님에게 보내는 답글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님이 칭송하는 위인은 누구에요?

  • 무휼
    청꿈이
    2021.11.21
    @무휼 님에게 보내는 답글

    홍준표

  • 청꿈이
    무휼
    2021.11.21
    @청꿈이 님에게 보내는 답글

  • 청꿈이
    궁예
    2021.11.22
    @청꿈이 님에게 보내는 답글

    난 신라시대 한정 신문왕 진짜 통일신라의 멱살잡고 향후 약200년간 지속되는 대 황금시대를 열었던왕

  • 완혜

    세종대왕은 민족 정체성의 뿌리를 만드신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