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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1페이지 조선사> 006 이성계가 사랑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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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1대 태조

 

강비로 더 잘 알려진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1396년)의 집안은 충혜왕과 공민왕 때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권문세족이었다. 무인으로서 세운 공로는 높지만, 변방 출신으로 한계를 느끼던 이성계는 중앙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신덕왕후와 결혼했다. 그러나 설화에서는 이성계와 강비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호랑이 사냥에 나섰던 이성계가 갈증을 느끼던 중 우물가의 처녀를 발견하고 물을 청했다. 처녀는 물이 담긴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운 뒤, 체하지 않게 천천히 마시라며 건네주었다. 이 모습에 감동한 이성계는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설화는 이 여인을 신덕왕후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1391년(공양왕 3년),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가 죽자 신덕왕후는 현비로 책봉되어 실질적인 조선의 첫 번째 왕후가 되었다. 신덕왕후는 방번과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이성계의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를 두고 이방원을 중심으로 신의왕후의 여러 아들이 반발하자, 신덕왕후는 화병으로 죽었다.

 

신덕왕후를 너무도 사랑했던 이성계는 사대문 안에 능을 조성하지 못하도록 정한 국법을 어기고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에 신덕왕후의 능을 조성했다. 이성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흥천사를 세워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지금의 서울 시청 앞 정동이란 지명은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었떤 데에서 유래한다.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신덕왕후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가 이성계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은 데다, 조선 건국에 기여한 것이 없는 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신덕왕후의 계략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이성계가 죽자 신덕왕후의 지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묘를 지금의 성북구 지역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정릉에 있던 석물을 모두 땅에묻었다가, 이듬해 청계천 광통교를 만들 때 정릉에 있었던 병풍석을 거꾸로 뒤집어 다리의 자재로 사용했다. 

신덕왕후는 1669년(현종10년),죽은 지 270여 만에 지위가 복위되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신덕왕후의 위패가 종묘에 배향되는 날 정릉에는 비가 내렸는데, 백성들은 이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는 비란 의미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씻을 (세) , 원통할 (원), 갈 (지), 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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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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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는밍구리

    TVNSTORY채널 벌거벗은 한국사 1회 주제가 이성계임

  • 민주는밍구리
    김세정
    작성자
    2022.05.08
    @민주는밍구리 님에게 보내는 답글

    무장으로서는 손색 없었다만

    왕이 된 후부터는... 음 자식들 등쌀에 말년 암울하게

  • 야로하
    2022.05.08

    예나 지금이나 쯧

  • 야로하
    김세정
    작성자
    2022.05.09
    @야로하 님에게 보내는 답글

    그러게 피바람이 부는것 같음

    권력 앞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