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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01 제1대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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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이름:성계

#출생~사망:1335~1408년

#재위 기간:1392년 7월~1398년 9월 (6년2개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홍건적에게 빼앗긴 개경을 탈환하고 원나라 군대를 격퇴하면서 명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1380년(우왕6년)에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크게 이긴 황산대첩은 가장 대표적인 승리다.

 

이 외에도 많는 전투에서 승리한 이성계는 고려 후기의 정국을 크게 변활시킬 수 있는 주요 인물로 성장했다.

 

고려 말,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요동 정벌이 추진되자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하지만 1388년(우왕14년), 최영의 결정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우군도통사로 요동 정벌에 출정한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 위화도에서 회군했다.

 

최영 장군을 꺾고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는 9세의 창와을 임금으로 모셨으나, 이듬해 창왕마저도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 시키고 공양왕을 새로이 즉위시켰다.

 

이후1391년(공양왕3년), 삼군도총제사가 되어 전제 개혁을 단행해 조선 건국의 경제적 발판을 마련한 뒤 1392년(공양왕4년) 7월, 공양왕에게 선양받아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했다.

 

이성계는 고려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조선에 맞는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다. 또 항교와 성균관을 건립해 유학을 진흥하면서 고려 후기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불교를 억압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나라의 기틀은 세운 것과 달리 왕위 계승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이성계가 계비 강씨의 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에 의해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고, 이성계는 방석과 방번 두 아들과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신하를 잃었다.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했던 이방원의 요청으로 둘째 아들 방과(정종)를 다음 왕으로 결정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울을 떠나 소요산과 함주 등에 머물렀다.

 

이때 태종(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흥에 있는 이성계에게 보낸 신하를 이성계가 모두 죽여버렸다는 이야기에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1402년(태종2년),서울로 돌아온 태조 이성계는 불교에 의지하며 세월을 보내다 1408년(태종8년)에 죽었다. 

 

태조의 능호는 건원릉으로, 그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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