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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을 강조한 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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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THSSHVILI

 

무실역행이란 공리공론을 배척하며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의 정신적 지표로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강조했다.

 

옛날 글인데 도산 안창호 관련 여러 일화를 잘 요약한 듯 싶어 원문 링크를 공유합니다

 

독립 운동 공이 큰 분들 중 우리 독립운동사 중 무장투쟁 한 분들만 너무 부각되고(i.e. 참고로 인도의 간디는 일제시대 당시 민족 언론사에 기고문 보내 조선이나 인도는 절대 무장투쟁으로 독립 추구하면 큰일난다 권고, 분풀이는 될 지언정 점점 테러리스트로 국제 사회 낙인 찍히고 독립은 오히려 멀어짐을 경고, 비폭력 저항 및 국민 역량제고, 계몽 및 교육을 더 힘쓸 것 강조)  오히려 정작 저 중요한 국민 각성, 교육, 통합을 외친 분들은 오히려 홀대를 받는 것 같아 안타깝더군요

 

바쁘신 분들을 위해 원문에서 흥미로웠거나 중요하다 생각된 내용도 일부 발췌 직접 인용하고 밑줄도 그어보았습니다

 

원문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2000

 

'務實力行(무실역행)' =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힘', 공허한 이론, 보여주기 식 말을 지양하고 참되고 성실하도록 힘써 행할 것을 강조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핵심 사상

 

​망국의 시대를 살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비통하고 치욕적인 온갖 일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통탄

도산도 개혁을 이끌고 힘을 길러 독립을 쟁취할 선비가 필요하다고 여겼다.그래서 조직한 단체가 '선비를 일으키는 모임', 즉 흥사단(興士團)

 

흥사단의 깃발에 '선비 사(士)' 자를 형상화한 기러기

1) 구만리 하늘길을 날아도 방향 감각이 확고하며 리더 및 동료 따라 질서정연하다. 기러기와 같이 정연한 순서가 안서(雁序)

2) 개인행동 x, 협동, 서로 응원 - 기러기와 같은 규율을 가지고 날아가는 것을 안행(雁行)

3) 신용과 신의, 죽는 날까지 일부일부(一夫一婦)를 지키는 것 또한 기러기의 특성

4) 가족주의 - 부부 사랑의 상징인 기러기는 새끼 사랑도 각별

 

도산 안창호가 신물에 썼던 기고문 중에서:

"묻나니 여러분이시여, 당신은 주인인가 아니면 나그네인가? 오늘 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대한 사람은 모두가 대한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상할 것이외다. 그러나 오늘 사회에서 주인다운 주인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글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선각자의 한탄, 21세기 사는 우리에도 해당되는 말

 

도산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독립신문을 접했다. 그런 후 서재필의 연설을 듣고 크게 감동, 18세 때 독립협회 적극 참여 적극적으로 국민 계몽 활동

 

안창호는 갓 결혼한 부인(이혜련 여사)과 함께 1902년 미국으로 갈 것을 결심 앞서가는 미국의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처음에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청소 일로 생계를 꾸렸다. 맡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한 백인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라고 감탄하면서 약속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급했다는 일화도 존재

 

한인 상인들 간 싸우는 모습 보고 미국인들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한인 친목회를 구성,이 모임이 나중에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로 발전 

 

도산은 남의 집 가정 고용인으로 일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줬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도산의 아내 이혜련 여사는 눈물짓는 날이 많아 '울보 새댁'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훗날 이혜련 여사는 "그분은 첫째가 조국, 둘째가 담배, 그리고 아내와 자식은 열두 번째였어요"라고 미국에서의 신혼생활을 회고

 

도산은 가족을 미국에 남겨놓은 채 1907년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오로지 조국과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만주,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멕시코, 하와이 등을 누비면서 국외 교민사회의 단결된 독립운동 지원을 고취

 

3남 2녀를 두었다. 막내아들은 평생 살아 있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도산이 서울과 상하이, 대전 감옥 등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미안한 마음이 묻어나 있다.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 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여간 죄스럽지 않다."

 

편지에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고 안타까워한 맏아들 필립(必立)은 허드렛일 하는 모친을 도와 어릴때부터 막노동을 하고 할리우드의 동양계 최초 영화배우로 활약

도산의 맏딸 안수산은 아버지의 빈자리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더욱 반듯하게 행동하고 노력했다. 미국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약

 

강남에 있는 도산공원-공원 여기저기에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어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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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은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도산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헛된 자리 욕심, 안락한 생활, 돈과 이성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언행이 일치한 삶을 살았다. 많은 미덕 중에서도 신의를 가장 중하게 여겼다. 한낱 어린아이와의 약속도 반드시 지켰던 도산은 민족의 지도자이기에 앞서 겸손한 인격자였다.

 

기타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 위한 링크들

역사저널 그날 -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의 관계는?.20190324

https://youtu.be/RTTXX2-Au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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