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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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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유나

 

1996년 9월16일 밤11시30분에 강릉 해안에 북한 잠수함 1척이 침투도중에 좌초하는 사건(강릉무장공비침투)이 발생했다.

이전부터 북한은 해당 경로를 따라 남한을 왔다 갔다 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날은 어선 그물에 걸리며 되돌아가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잠수함을 버리고, 북한까지 걸어서 이동하기 위한 결심을 했다.

혹시 북상하는 중간에 국군에게 적발될 것을 대비해 남한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을 발견한 것은 택시기사였다.

 

택시기사는 이날 다방 종업원을 태우고 이동하다가 잠수함 발견했는데 우선 다방 종업원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경찰서에 달려가서 북한잠수함을 신고했다.

당시 우리 아군 측이 발견을 못했던 이유는 초소와 초소 사이인 사각 지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군은 신고를 받고는 즉시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무장공비들이 북상하는 중 험악한 산악지형을 통과하는 데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이때 무장공비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침투조와 훈련받지 못했던 잠수함을 운영하는 승조원들로 나뉘어 있었다.

근데 식량도 모자랐고, 특수훈련을 받지 못했던 승조원들은 괜히 데리고 다니는 데 짐만 된다고 파악한 침투조는 잠수함 승조원들 11명 전원 권총으로 사살시킨다.

 

실제로 다음날인 17일, 우리 국군이 북한 시체 11구를 발견하고 현장 검증까지 마쳤다.

남은 무장공비들이 북상하던 중, 식량은 다 떨어지고, 진퇴양난을 겪게 된다.

침투조원 중 1명인 이광수가 민가에 들어가서 주민에게 인사하고 음식을 달라고 청한다.

당시 남편과 부인이 있었는데, 이광수가 무장공비라고 눈치 챘지만 모른 척하면서 남편이 태연하게 음식을 내주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남편이 시간을 끄는 사이에, 부인이 몰래 경찰에 신고하고, 바로 경찰과 군인들이 출동해서 무장공비 한 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무장공비 1명이 생포됨에 따라, 인근에 무장공비들이 더 있을 거라는 추측으로 인근 장병부대가 산속을 수색해 끝내 침투조인 무장공비들을 찾아내 3명을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

생포된 이광수는 일체 자백도 안하고, 협조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공산당들이 남한에 쳐들어와서 전부 박살낼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다가, 우리 측이 광어회를 주문해줬는데, 순간 광어회를 보고 눈이 뒤집혀졌는데 북한에서는 광어회가 고위층에서도 최고 고위층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식사였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광어회를 허겁지겁 먹으면서 이것저것 사실대로 전부 불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가 가장 알고 싶었던 정보는 도대체 몇 명이 내려왔는지였는데 이광수가 26명이 내려왔다고 다 자백한다.

남한에 내려오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정들을 광어회를 먹으면서 전부 다 알려줬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남한에 내려온 인원은 26명이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이미 사살된 승조원 11명과 이날 교전으로 사살된 3명이었으니 이광수를 제외한 남은 11명만 찾아내서 사살시키면 상황이 종료된다는 것을 계산하게 된다.

이는 실제로 네이버에서 ‘이광수 광어회’ 두 단어만 검색해보면, 다 나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무장공비들과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는데 무장공비들도 사살 되고, 우리 측 군인들도 피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장공비가 침투한지 이틀째인 18일에 강동면에서 무장공비 1명 사살했는데 사흘 뒤인 21일부터 우리 측도 첫 전사자가 나왔다.

이튿날에도 치열한 교전으로 인해, 우리 측 일병과 상병 2명이 전사하고 무장공비측도 2명 전사했다.

23일엔 우리 측끼리 무장공비로 오인 사격해 민간인 1명 사망하기에 이른다.

당시 북한 측 입장에서도, 공비들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연일 남한을 비난하고 협박하기 시작한다.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면서 실제로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국내영사 1명을 피살시켰다.

외국에 있는 우리 영사가 피살당하자, 한국도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켜주고 북상하는 도망가는 길을 열어주기에 이른다.

당시 우리 국군장병들이 아직 무장공비들이 날뛰는데 왜 철수하게 놔두느냐고 오열하면서 자기가 때려잡겠다고 했지만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대부분 철수한다.

당시 무장공비들은 거의 다 사살된 상태였고, 생포된 이광수를 제외하고 2명만 남은 상태였다.

 

군부대 철수 후, 한동안 잠잠하다가, 무장공비들이 순조롭게 북상하면서 여러 사건들을 또 일으키게 된다.

남한 병력들이 철수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남은 무장공비 2명은 ‘북한 동지들이 도와주고 있구나’하고 판단하고 이때부터 기고만장인 상태로 돌변해 우리 군부대 모습들을 촬영, 수집하면서 북상을 시작하게 된다.

또 나물 캐는 민간인들을 협박해서 산나물을 빼앗아 먹고 주민들도 사살시키는 등 아주 극악 잔인한 행태를 보였다.

긴 강인 소양호를 수영으로 건너고, 북상하면서 우리 아군 부대를 무단으로 들어가서 표종욱 일병을 살해하고, 무기들도 훔쳐 나오면서 무기를 더 한층 보강시키기도 했다.

그러던 중 11월5일 연화교 매표소에서 야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당시 무장공비 2명이 우리 전투복을 입고 지나가는데, 우리 장병들에게 검문 도중 당시 소속과 암호를 대라고 추궁 당하자, 무장공비들이 먼저 총기를 발사하고 도망친다.

이때 우리 장병들도 방탄모를 착용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느낌상 무장공비구나 판단 하에, 조준을 하고 있었기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난사하면서, 적군과 아군이 서로 총 한발씩 맞고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당하지 않은 적 1명이 도망갔다가 의리로 다시 되돌아와서 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부상당하지 않은 적 1명은 부상당한 적 1명을 부축하고 그 자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무장공비가 출현했다’고 바로 육군과 기무사에 보고가 되었고, 여기 총격이 있었던 장소에 부대가 출동하게 된다.

기무대장(대령)도 총격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장에 즉시 달려갔는데 간부들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공비들이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알려주자 순간 오 대령이 도망친 방향으로 손전등를 비췄다.

이때 무장공비들이 오 대령을 향해 총을 난사했고 결국 그 자리서 사망하고 만다.

당시 기무대장이었던 오 대령은 물론, 옆에 있었던 간부 소령도 같이 즉사했고 옆에 있던 장병들 8명도 크게 부상당했다.

그렇게 밤새 교전을 벌이다가, 아침 10시에 남은 무장공비 2명을 겨우 사살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45일 만에 강릉 잠수함 침투 무장공비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된다.

현재 남한서 생포되었던 이광수는 결혼도 하고, 해군에 입대해서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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