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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수도이전+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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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홍 조교

추후 추가내용있으면 추가할 수 있음


https://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2563&mediadtl=9420&gbn=DT


1977년 2월 연두순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을 쭉 둘러보시곤 이렇게 말했다.


"수도의 인구 집중 억제는 여러 정책을 수립해서 강력히 추진하겠지만 결국은 우리가 통일될 때까지 ‘임시 행정수도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로 인구가 점점 쏠리는 것을 보고

이제 서울발전은 이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한거다.


1970년대 대한민국 중화학공업과 수출주도 정책을 지휘한 오원철 비서관은 대통령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행정수도 계획과 균형개발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만들어 진것이다.


가로림만(灣)은 충남 북서안에 자리잡은 만으로 행정구역상 서산시와 태안군이 인접해 둘러싸고 있다. 


1979년 당시 청와대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20만t급 대형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고 주변 야산지대를 등에 업고 넓은 공업기지를 형성하기에 적합하다. 


특히 가로림만은 오랜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수심(20m)이 깊고 방파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파도가 안정돼 있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1977년 중부 공업기지 건설안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고(故) 정주영 회장을 동행한 채 헬기로 가로림만 일대를 시찰한 후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정 회장도 당시 가로림만에 종합제철소 건설을 구상했고 만(灣) 입구의 땅을 구입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가로림만을 동북아 허브 항구로 키우고 교육, 의료 등이 특화된 지역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 계획아래 신도시에 공업용수를 공급할

삽교천 공사를 시작한 그날


김재규의 총에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약 1억㎡(3억평) 규모에 400만명 정도가 거주할 있는 공간으로 구상됐던 ‘가로림 자유경제특구’도 물거품이 됐다.




<전두환 지지자가 보면 불쾌해지는 후일담>


※※.당시 충청도는 박정희대통령의 조카사위 김종필의 인기가 강한곳이였다. 

전두환은 권력을 잡기위해 5.17 박정희 정부인사들을 총구를 들이대며 강제 연행했고

석빙고에 가둔뒤 불법으로 쌓아둔 재산을 내놓으라 했다.(김종필 회고록 내용)

또한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총 지휘했던 오원철 비서관을 중용하긴 커녕 쫓아내고 허튼짓못하게 감시했다 (조선일보 인터뷰내용)


이 과정에서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날아가버렸고 저곳에 지어질 예정이었던 제2 종합제철은 전남 광양에 지어진다. 

(전라도 민심을 수습하려던것인지도?)




전두환은 아내를 위해 강남에만 주로 몰두한다.

당시 영부인인 이순자는 연희동 빨간바지가 별명일정도로 투기개발 현장을 자주 다녔는데,

서민주택 500호가 지어질 목동에 88올림픽개최를 위한 돈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서민주택건설계획을 취소한 뒤 목동신시가지아파트를 세워버렸다.

이 과정에서 원래 목동에 살던 사람들은 경기도 시흥시로 이주했다고 한다. 

(대부분이 무허가주택이나 쪽방에서 살고 있었음)


노무현대통령은 이 계획과 비슷한것을 해보려 했지만

법원이 수도는 서울이라며 관습헌법을 들이대는 바람에 쪼그라들어 지금의 세종시가 되었다.


현재 세종시엔 혹시나 이동할 수 있다는 명목하에 청와대등이 옮겨올 수 있는 땅공간이 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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