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제주 4·3이 진정한 '대한민국의 역사' 되려면 - 조선일보 (chosun.com)
이글은 필자 본인이 작년 교양수업들으며 칼럼을 분석했던 과제임. 조원들끼리 5가지관점에서 텍스트를 분석하는거였지만
본인이 분석했던 관점으로 올려볼게
5. 사회적 관점
- 제시된 사회적 쟁점은 무엇입니까?
제주 4.3사건에 관련한 의견은 이승만 정부가 제주도를 공산주의 지역으로 규명하고 무참히 탄압하고 학살했다며
정부에 책임을 묻는 주장과 이와 반대로, 제주도에 남로당세력이 자리를 잡아 제주도를 공산화시켜
이승만 정부가 경찰과 병력을 앞세워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한 것이라며 남로당세력에 책임을 묻는
의견들이 대립각을 세워 사회적 쟁점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 갈등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제주 4.3 사건은 희생자 규모가 너무나 큰 사건으로 충격적인 데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에 첨예한 쟁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제주도에서도 진압 군경과 남로당 무장대에 살해된 희생자 유족들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고 있어 섣불리 끼어들기 어려웠다.
수십 년 동안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온 희생자 유족들에게 적극적인 위로의 손길을 내밀 수 없었으며
교육계에서도 제주 4.3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성을 두었으며 묻어두었기 때문에
오늘날 양측의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 제시된 사회적 갈등은 어떤 입장에서 서술되고 있습니까?
이 칼럼에서 제시된 제주 4.3사건에 대한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는 노무현 정부시절 작성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제시된 자료에 따라
남로당이 제주4.3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제시한 사회적 갈등은 우리의 현재,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제주 4.3 사건에 대한 사회적 갈등은 현재 각종 사이트나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제주 4.3 사건 강의 댓글 창에
제주도는 공산주의자의 섬, 소위 빨갱이 섬 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진압한건 잘한 판단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반면
반대 측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질타하는 모습이 보인다.
즉, 이 칼럼에서 제시한 제주4.3사건에 대한 사회적 갈등은 아직도 양측의 진영논리에 빠져서
서로 물고 뜯는 형태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고 미래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갈등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본래 제주4.3 사건은 양측의 진영논리로 갈라져 사회적 쟁점이 되는 것 보다
공산주의 좌익과 자유 민주주의 우익 사이의 이념대립으로 희생된 시민들을 애도해야하는
본질적인 목적이 희석되는 상황이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 나타난 사회적 갈등에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응하였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에 대한 나의 평가는?
우리 사회는 제주4.3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따지면 솔직히 말해 많이 아쉬운 상황이다.
본인이 학생시절 역사를 배울 때만 해도 제주4.3 사건은 역사교과서에 날개부분으로 간략하게 나올 정도로
설명이 부실했고, 이를 다루는 경우도 매우 적었으며 수능시험에는 시험문제로 거론되는 일이 없었다.
최근에 들어 제주4.3사건을 조금씩 조명하는 느낌의 정책들이 거론되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며
역사 강사의 제주4.3 사건 강의나 여러 채널이 제주4.3 사건에 대한 강의로 제주4.3 사건을 조명하지만 대부분이 많이 아쉬운 점은 사실이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건이 일어난 원인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과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 콜레라와 흉년 등을 겪으며
매우 힘든 삶을 살았던 제주도민들의 뜨거운 교육열기로 주민 자치 초등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되어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46년부터 진보적인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로당의 주도하에 그동안 쌓여왔던 반일, 반미감정이 표출되었다.
1947년 3월1일 3.1절 28주년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의 남로당 등 좌파세력이 주도해 시위를 하다
시위를 막기 위해 온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차여 소란이 발생했으며 기마경관이 모른 채 지나가자
제주도민들이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6명이 사망, 8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를 제주 3.1 발포사건이라 칭한다.
이렇게 반감을 갖게 된 상태의 민심을 남로당이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후에 1948년 미군정에 의해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이 불법화되며 남한 단독 총선거 일정이 발표되자
이에 반대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킨 것이 2.7사건이다.
후에 미군정과 좌파 간에 치열한 대립국면이 표출되었으며, 좌파진영에서는
시위, 삐라 살포, 전주 절단, 철도 파괴, 지서 습격 등의 격렬한 선거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전북지방의 경찰서 26개소가 일시에 피습 당해 4개소가 파괴되고 2개소가 소실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김달삼을 주도로 2월 신촌 회의를 통해 무장봉기를 계획할 것을 결정했다.
1948년 3월 남로당은 제주도 인민유격대를 결성하였으며 이는 김달삼, 이덕구를 중심으로한 전투부대며
이들은 소총과 일본도, 제주도지역의 창으로 무장한 부대이다.
후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가 예정되어 당의 존립이 위협받자
1948년 4월 3일 새벽2시에 이들은 제주도 경찰서 12곳을 급습하며 제주4.3 사건이 시작되었고
우익진영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당 등의 우익단체들을 파견해 습격하였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제주4.3 사건을 강의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황xx, 설xx,역사xx 그날 같은 읍읍이들 말한거임)
유튜브의 여러 채널과 이름 있는 역사 강사들까지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상황을 설명해주는 강의는 별로 없다.
오히려 제주4.3 사건이 발생한 원인과 진압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양측 진영의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서 희생당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표현한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의 5분짜리 영상이 더 상세한 원인과 결과의 상황을 묘사하는 듯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L0Q3ajQNwyg&feature=youtu.be -야인시대 제주 4.3사건-
후에 이러한 인과관계를 기준으로 두어 사건의 진행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강의가 게시되어
제주 4.3 사건에 대한 판단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우리사회가 제주 4.3 사건에서 나아가야할 진정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C%A3%BC_4%C2%B73_%EC%82%AC%EA%B1%B4
하다하다 야인시대만도못한 강의들을 보고서 저런워딩을 쓰긴했는데 암튼 저 과제가 주어졌을때
이때 한번 써보자 하고 올렸던 과제였음. 암튼 퀄리티 좋은 역사강의를 내주는 채널이 많아지길 바라는마음이야
예약
"43" 또는 "43사건"으로 항쟁도 학살도 아닌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명명된 이유는 43을 자기 정치적 이념에 끼워맞춰서 갈등이 지속됬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43을 아픈 역사로 가르치지만 세세히 설명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명명된 이유와 같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진상보고서겉은 관련서적을 일거나 기념관 등을 찾아가 직접 확인해보라는 경험위주의 교육을 주로하다보니 내막을 자세히 가르치지않는다고 오해하는 것 같으나, 실네 43의 이름을 규정짓는 것조차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된 이념갈등때문이었고, 남로당이든 군경이든 두 집단 모두에 의해 희생당한 아픈 역사이기에 설명과정에서 자칫 교육자에 의해 편향되게 설명될 수 있어서 그걸 피하다보니 그런 오해를 보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주출신의 현지 경찰들은 오히려 31발포사건과 그로 인해 발생한 총파업에 동참하는 등 동조적인 입장이었고, 이들을 파직하고 파견경찰(서청단원들의 집단적인 파견경찰 지원)들을 충당해 채웠고, 진압주체를 단순히 군경이라고 단정짓기엔 애매모호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찰과 군대의 갈등의 골이 깊었고, 진압경찰도 극우적 성격이 짙은 서청단원들이기에 여기에 질린 군인들이 오히려 유격대에 항복하면서 유격대의 무장력이 강화되는 일화들도 있었습니다. 43과 연관된 여순사건도 남로당이 묻긴 했지만 이런 뿌리깊은 군경갈등의 골이 있기에 발생한 것입니다. 군경vs유격대의 단순한 대립구조도 아니었으며, 대의원 투표사건을 보더라도 서청위주의 지원경찰vs제주도민vs남로당 유격대의 구조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음.. 본인은 학생시절 교과서에서 4.3사건을 제대로 교육받은경험이없어서 적은글이었습니다. 수능특강같은경우에도 옆날개부분으로 나왔을뿐 그내막을 알려주진않았거든요. 또, 저는 서청위주의 지원경찰vs제주도민vs남로당 유격대의 구조 보다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정안에 자유주의 진영의 실책을 틈타 교육과 선동으로 남로당이 제주도민들을 포섭했다고 봅니다. 물론 전 제주도민들이 그렇진않겠지만, 그당시 미군정의 실책으로 국민정서가 안좋았던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좋은부분이었기 때문이죠. 말씀하신 서청단원들의 극우적인 성격도 동의합니다. 그러니 좌익과 우익이념 대립으로인한 제주도민들의 희생이라는 워딩을 적용했구요.
그래서 제가 언급한 것이 대의원 투표사건인 일명 백지날인사건을 꼭집은 것입니다. 1948년 8월 남로당원들 40여명이 세화리에 불법침입하여 주민들에게 투표용지라면서 백지를 주고, 서명을 강요하며 자기들에게 식량을 요구한 사건인데요. 이에 불응하면 총으로 쏴죽이거나 집이 방화당하는 등 픽밥을 받았고, 일단 서명만하면 살려준다니 서명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이 서명한 백지는 북한선거에서 남조선 대의원 명단 서명으로 둔갑되었고, 훗날의 일이지만 협박에 못이겨 서명한 것때문에 경찰들에게 고문당하게 됩니다. 제주도민들은 낮에는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운 무장대에게 끌려간다는 옛 말이 괜히 있던 게 아닙니다. 무장대에게 습격당해 죽은 주민들이나 경찰들 모두 43의 피해자들입니다. 43이 안타까운 이유는 무장대에 협조했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역사라서 억울한 게 아니라 이념갈등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희생당했기에 억울한 역사인 겁니다. 중산간 지역 주민들은 원래 산에서 살았는데 하산하지 않으면 무장대에게 협력한다고 여겨져 학살당하고, 정작 산아래 해안가 주민들은 밤에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에게 습격당하는데 안당하고 배기겠습니까. 제주도의 총파업에 남로당이 선동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당시 도지사 박경훈도 31발포사건의 잘못을 인정하고 총파업에 동참했었습니다. 앞서 제주출신 경찰들이 합류나 도지사의 합류처럼 오롯이 남로당 주도의 총파업이 아닌 민관이 주도하였고,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박경훈 도지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친미적인 인사라며 두둔했었습니다. 도민들을 포섭했다고 볼만한 부분은 민관이 연계한 대규모 총파업이나 남조선 대의원 선거 서명이라고 생각해서 글을 썼지만, 이는 모두 43진상보고서에 나와있는 반박이 되는 내용들입니다. 전체적으로 어느 부분에서 대다수 도민들이 남로당에 포섭되어 협조했는 지는 모르겠으나, 43이 비극인 이유는 정당한 사유없이 양쪽 진영들한테 뚜까맞은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대부분 내용에 동의합니다. 특히나양쪽진영에 희생당한점은 부정할수없는내용이죠. 다만 저의 시각에서는 공산주의진영에서 파업뿐만아니라 공산주의 교육을통해 주민 들을 포섭했다고 알고있습니다. 또한 국가적으로 그시대엔 공산주의 열풍이 불었기도했구요. 물론 백지날인사건같은경우도 있지만 공산주의교육을 받은 주민들의 케이스도 빼놓을수없다는점을 말씀드리고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마다 생각이다르니 여러가지 케이스가 발생했다고봅니다.
4.3사건으로 일어난 여수 순천 10.19 사건도 괘씸하다고 생각합니다. 투표하라고 아니까 그제 와가지고 폭동일으키고.. 그대는 민주적 사고방식이 떨어져서 그렇다 치더라고 상관이 명령했는데 불복종하는거는 아주 괘씸하다고 봅니다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 김달삼이 일으켰고, 그걸 과잉학살한 경찰들이고 결론은 둘다 잘못한 겁니다. 애꿎은 제주시민들만 희생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