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1961~1979), 전두환 정부(1981~1988)
(1961~1988)
대한민국은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고 이 두 정부에 의해 격동의 시대를 겪었습니다. 철권통치에 민주주의가 억압되고 통제가 이루어진 이 시기.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폭풍같은 성장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격동의 시대에 활약한 두 마리의 학(청렴결백)을 소개할까 합니다.
헌정을 무너뜨리며 일어난 박정희 정권. 당시의 경제개발정책은은 이승만 정부로부터 바통터치 받은 경공업 중심의 개발정책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농사나 짓던 나라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렸고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에선 절대적으로 돈이 부족했고 큰 돈이 필요한 중화학 공업보다 경공업 위주의 산업이 육성되었습니다. 그것마저 버거웠지요. 흔히들 박정희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고 독선적이라 생각합니다. 예 사실 그러니까 독재했겠지요. 하지만 다른분야는 몰라도 경제에서만은 달랐습니다. '적재적소에 사람을 맞는 쓴다.'
1966년 막강한 추진력을 가진 김학렬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합니다.
김학렬은 기존 경공업 중심의 경제개발을 과감히 중공업으로 변환시킵니다. 자원하나 나지 않는 나라에서 중공업을 육성하겠다는 개발계획은 거센 저항에 부딪혔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김학렬의 결심과 추진력은 굳건하며 믿고 맡긴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하에 (무려 한일 협정으로 자금까지 마련해가며) 불도저처럼 밀고 나갑니다. 포항제철이 설립되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며 박정희 정부는 폭발적인 외적성장을 이룩하게 됩니다.
이때 김대중 선생님께서 도로위에 드러누우신 일화가 있죠. 하지만 불도저는 그런 요철따위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굶지않는 나라의 토대를 완성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드라마를 보아도 영웅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몸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일하던 김학렬은 췌장암에 걸려 1972년 몰아치는 폭풍처럼 성장하는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스러집니다. 향년 49세. 박정희 대통령은 "쓰루(학)는 내가 일을 많이 시키는 바람에 일찍 갔다." 라고 탄식합니다.
중공업 성장으로 야생마처럼 날뛰던 대한민국. 어마어마한 벌크업 후의 진통을 겪게 됩니다. 날뛰는 물가상승률. 민주화 의지. 노동자 권리의 요구. 부마 항쟁, 오일파동을 필두로(국제유가는 중공업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경제,정치적 문제가 터지고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며 무대는 전두환 정권으로 바뀝니다.
전두환 또한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요. 네 그러니까 독재했겠죠. 하지만 또 다른덴 모르겠고 경제에 관해선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기위해 노력합니다. 이거 참 무자비한 한국의 독재자분들께선 경제학자에 관해서 만큼은 얼마나 다정하신지... 정부수립 이전 국보위부터 김재익 선생님을 모셔갑니다.
"마! 내 경제 스승이 해!"
시작은 전두환의 가정교사 입니다. 경제에 대한 지식이 지금의 두발만큼 없던 전두환장군은 김재익에게 홀랑 반해버리고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김재익을 경제수석에 꽂아버립니다. 실제로 경제학을 공부하면 기본참고서 맨큐의 경제학 100페이지를 읽자마자 정체모를 누군가에게 반해버리긴 합니다. 어쨌든 이분도 청렴결백한 일벌레였는데.
"저한테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제안하는 경제정책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여러 말 할 거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
대충 이런 유명한 말을 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김재익은 박정희의 남자 김학렬과는 대충 상극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김학렬이 파워헬창이라면 김재익은 명상? 같은 느낌. 국가주도, 중공업 위주의 몸집불리기를 시전한 김학렬에 의해 대한민국은 물가상승 공업균형 불안정 같은 근육통에 찢어지고, 김재익은 명상으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아 전두환 대통령 인선 지렸구요. 경제 완급조절 상타치입니다.(의도는 하지 않았겠지만) 김재익은 작은정부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케이스로 작은정부를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죠. 날뛰는 물가상승률을 해소하는데 주안점을 둔 김재익은 3년만에 환상적인 실적을 내버립니다.
1980 | 1983 | |
물가상승률 | 28% | 3.5% |
경제성장률 | -1.6% | 13.4% |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성과는 이후 전두환 정부의 경제성장 이유중 하나로 꼽히는 3저 호황 이전에 이뤄낸 것이란 것이죠.
이 와중에 김재익이 진행한 다른 일도 있는데 바로 IT 사업의 신호탄. 한국통신(KT)의 설립이었습니다.
당시는 인터넷이란건 말할 것도 없고 집전화 한대가 집한채 값에 맞먹던 흉악한 시대였습니다. 이때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에서 통신을 민간으로 이양해 한국통신을 설립했습니다. 모든 통신장비를 해외에서 수입해 쓰던 시절 흉악한 전화 가격은 통신의 발달을 저해했습니다. 이때 선견지명으로 국산화의 길을 걷고 정보통신 사업을 시작한 것이 김재익 이었습니다. 당시 10억원 짜리 사업도 드물던 시절 240억의 과감한 투자로 이끌어낸 김재익표 IT 사업.
휴대전화와 콜라보하여 지금 대한민국의 주축사업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김재익 선생님은 이 투자의 결실을 보기전 1983년 아웅산에서 북한의 테러로 운명하셨습니다.
고도 성장기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대한민국을 이끌어오신 경제선봉장 김학렬 김재익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안타깝게 끝을 맺었습니다.
폰으로 쓰는거 되게 빡세네요 내가 뭔말을 썼는지 확인하는게 힘들다는게 제일;;
김대중 전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에 드러누웠다는 일화는 들어봤는 데 누구는 반대할려고 드러누웠다더라 누구는 그거 일베의 음모론과 합성사진일 뿐이다라고 하던데 뭐가 맞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유명한 일화인데도 양측 의견이 달라서 혼동되더라고요. 뭐가 맞는걸까요
드러 누웠는지 아닌지 저도 들은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에 일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한것은 확실하지요
김대중의 경우, 흔히 아는 드러누운 사진은 합성 사진이고 경부고속도로를 반대하긴 하였지만 반대논리는 지역과 지역간의 국도와 지방도먼저 건설하고 고속도로는 그 다음이다, 특정 지역을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먼저 뚫리면 지역 차별을 가져온다. 라는 논리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박통의 경부고속도로가 주효하게 혈관 역할을 해주었고 이후 김대중 등은 이러한 식으로 70년대 이후에는 특정 지역(서울 경상)에 치중된 개발 논리는 지역 차별을 가져온다. 라고 지역감정을 활용하여 서울에 상경한 전라도 인구 + 전라도 거주인들의 표를 '경상도 대통령'에 대해 상당수 뺏어오는데 성공합니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심각하지 않았던 지역별 표차이가 5공을 거치며 결집되기 시작하고 6공 이전에는 PK의 YS, 충청의 JP, 호남의 DJ. 마지막으로 TK의 노태우까지 4자 구도로 가다가 3당 합당 이후 이 표들이 합쳐지게 되죠. 그 이후부터는 뭐 아시는 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