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철저히 상명하복하는 '한국군'이
이렇게 완벽한 전술을 구사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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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투중 가장 영향력이 크고 전술적으로 완벽한 전투로 평가받는,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체코의 아우스터리츠 지역에서 싸운 전투이다. 수적으로 프랑스군이 불리했다.
거기에는 프라첸 고지라 불리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을 점령하는게 중요하단걸 파악한 나폴레옹은, 일부러 다른지역을 약하게 함으로써, 적군을 유인, 그리고 그틈을 타서 고지를 점령후 적군에게 대포를 쏘게했고 이는 완벽히 들어맞아 연합군은 갑작스런 포격에 우왕좌왕했다.
근데 갑자기 예상못했던 적군의 신병들이 프랑스군이 차지한 고지에 등장했다. 이 프랑스군들은 포병으로 사격에만 능숙한, 즉 보병이 아니었다. 여기서 포병이 무너지면, 프랑스군의 패배는 확실했는데...
이 포병들은 적군이 신병이라는걸 알아채고 칼을 들고 고지를 뛰어내려오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누구의 지시가 아니라 고지를 점령한 부대의 독자적 판단이었다. 나폴레옹은 적군 등장시 포병들에게 백병전을 하라고 시킨적이 없었다.
그런데 적 연헙군의 신병들은 높은 위치에서 칼을 들고 내려오면서 하는 백병전 공격에 무너지고 도망갔다. 고지를 사수한 프랑스군은 계속 대포를 쏟아냈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패퇴할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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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복종심을 단기간에 높이기 위해 처벌과 폭력 등의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간부들에게는 승진을 위한 유혹을 부여하여 굴종의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폭력은 세뇌교육의 일부로서, 그리고 군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일본군대의 모든 면에서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복장상태, 병기손질, 내무생활 불량, 태도불량 등 장병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장교는 하사관을 구타하고 하사관은 고참병을 구타하고 고참병은 신참병을 구타하는 연쇄고리가 연결되어 군대에는 절대복종이 강조되고 신병들은 소나 말 같은 내무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폭력 중 가장 흔한 것이 따귀를 때리는 것인데 그것은 맨손바닥이 아니라 주먹이 이용되었다. 서툴게 피하기라도 하면 그 제재는 배로 증가하였다. 따귀때리기에는 주먹 뿐 아니라 혁대갈기기와 슬리퍼갈기기도 있었고 전우끼리 서로 때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친구라고 적당히 때리면 ‘따귀는 이렇게 때리는 법이다’고 하면서 하사관들이 시범을 보이기 위해 전우를 평소보다 세게 때려 피해가 더 커지기 때문에 친구끼리도 서로 힘껏 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귀 이외에 참나무 곤봉으로 엉덩이를 치는 것도 있었다. 해군에서는 정신봉이라 하여 이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맞는 사람은 다리 가랑이를 벌리고 양손으로 발목을 잡아 엉덩이를 내미는 자세를 취한다. 때리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후려갈기기 때문에 맞는 순간 앞으로 쓰러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곧 처음 자세로 돌아가 다음 일타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밖에 명치를 위로 쳐 올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훈련중에 엎드린 사람 다리를 냅다 걷어 차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경우는 다반사이고 본격적으로 제재를 가하기로 하면 몇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 손과 발을 다 써가며 문자 그대로 뭇매를 때리기도 하였다. 직접적인 폭력 외에도 구보나 포복 총검술을 몇 시간씩 계속 시키는 방법도 있고 받들어 총 자세를 몇십분씩 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병에게 폭력을 직접 가하는 것은 하사관이나 고참병이지만, 장교는 하사관 이하의 폭행을 전혀 금지하지 않았고 때로는 기합을 넣어라고 교사하는 일도 있었다. 장교 자신이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폭력은 일본군의 체질이며, 사적제재는 고난을 견디는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필수의 수단이라는 사고방식이 군대 내에서 강했다. 사적제재를 참고 견디지 못하는 군대는 고난의 연속인 전장에서 별볼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싸움터에 나가면 군대 내부의 생활규범, 즉 사적제재가 어느 정도 풀어지기 때문에 신병 중에는 작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숨이 위험에 직면하는 전쟁터보다 병영 내의 내무생활이 더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육군 뿐 아니라 해군에서도 구타는 심각하였다. 후일 가이텐 특공대원으로 전사한 해군학도병은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군대에 대한 기대가 커서 직업군인으로 복무할 생각도 했으나, 일단 군에 입대하고 보니 군의 형식적인 가혹한 인습과 구타 등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적고 있다.
구타의 심각성을 인지한 일본군 수뇌부는 군대교육의 본부인 교욱총감부나 각 연대장들을 통해 사적제재의 금지를 때때로 시달하였지만 그것은 1945년 일본군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처절한 군대생활은 개략적으로나마 일반 사회에도 알려져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청년들의 징병기피 사유의 하나가 되었다. 즉 병영 내의 폭력과 사적제재는 말만 들어도 그들을 떨게 만들었다. 도망과 실종 이외에도 고의로 자해하거나 체중을 줄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부러 죄를 범해 징병을 모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외이민자와 유학생 중에도 이 목적으로 출국한 사람도 있었다.
폭력은 육체 뿐 아니라 정신 면에서도 사정없이 가해졌다. 우선 군인 칙유에서부터 군대 내무령에 이르기까지 암기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적당히 요약하거나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정신상태가 해이한 것으로 판정되어 어디까지나 기계적인 암기가 요구되었다.
일본군에는 또한 형식주의와 명분주의가 만연하였다. 즉 아침점호시간에 몸이 아픈 사람은 보고하라는 말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아프다고 신청하면 정신상태가 해이되어 있다고 사적제재를 당하였기 때문에 아픈 것도 마음대로 치료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군대에서는 적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대개의 경우 나쁜 짓을 해도 좋은 것 같이 생각되었다. 특히 절도는 하사관으로부터 묵시적인 권유까지 받았다. 주어진 보급품의 개수가 부족한 경우에는 다른 중대에 가서 숫자를 채워 오라는 말을 들었고, 그런 짓을 할 수 없는 병사는 고문관, 혹은 멍청이라는 모욕과 함께 구타를 당하였다. 반대로 민첩하게 적당히 숫자를 채워 전우에게 나누어 주는 병사는 재주 있고 똑똑한 자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군인칙유는 ‘군인은 충절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었지만 군대 내에서는 이것을 비꼬아 ‘군인은 요령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말하곤 했다.
형식주의, 명분주의는 통상 권위주의를 수반하였다. 계급이 하나만 높아도 하급자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였다. 같은 계급의 경우라도 하루라도 일찍 입대하였으면 그에게 복종하여야 했다. 이러한 것은 군인칙유에 명시되어 있었다. 화가 나면 이유가 없어도 군기를 확립한다는 이유로 사적제재를 가하였다. 상급자가 지시한 것에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일체의 비판과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도 군대 내무령 제11항에 ‘명령은 겸손하게 지키고 실행한다. 결코 당부당을 논하거나 그 원인과 이유 등을 질문하는 것을 불허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명령이 없는 경우에도 질문은 꺼리게 되어 자유로운 토론은 원천적으로 봉쇄 되었다. 맥빠진 질문이면 상관 없으나 핵심을 간파한 껄끄러운 질문이면 건방진 놈으로 주목을 받고 후일 언젠가 앙갚음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와 같은 절대적인 권위주의가 활개치는 상황에서는 상사에 대한 부하의 아첨도 그대로 통하게 되어 있다. 상관의 보잘 것 없는 훈시에도 눈을 반짝이며 듣지 않으면 안되고 어떤 시시한 농담도 웃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행군에서도 무거운 것은 하급병사가 메지 않으면 안되고 보급이 두절된 상황에서는 식량의 수집도 병사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기아에 직면해도 장교와 하사관에게는 충분한 식사를 제공해야 했다. 태평양의 고도 메레온 섬에서는 보급이 끊기고 자활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 때문에 아사자가 속출하였는데, 아사자의 비율은 하급자로 내려올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렇듯 절대적인 권력이 군림하고 비판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상급자가 부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군대 내에서의 뇌물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감시의 눈이 없는 전장에서나 점령지에서는 많은 고급장교들이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군대가 폭력으로 만연된 기구라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과 방법이 없으면 조직으로 영속할 수 없다. 즉 조직의 존재 명분과 목적이 없으면 단결은 기대할수 없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군에서 이러한 명분과 역할을 제시한 것은 다름 아닌 천황폐하의 황군이었다.
즉 군인정신의 근간으로서 군인들이 조석으로 암기하는 군인 칙유에는 ‘하급자는 상관의 명령에 승복하고, 그것은 짐이 직접 명하는 것으로 알라’는 문구가 있다. 이 구절은 상급자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무리한 명령을 하달하거나 폭력을 휘두를 때 자주 인용되었다. 즉 ‘내가 말하는 것은 천황폐하의 명령과 같다. 천황폐하의 명령을 어기는가?’라고 고함치고 군기를 잡기 때문에 반대와 비판은 결코 용납되지 않고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기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에 명분을 부여한 천황제는 그 정통성과 합리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폭력에 의지하게 되어 흉폭한 폭력과 아리송한 훈시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병사들을 병영 내를 미쳐 날뛰는 명령대로 움직이는 맹목적인 집단으로 만들게 되었다. 즉 군 생활의 모든 것 위에 강철 같은 규율이 있었다. 복종과 노예적인 무저항을 강요하는 욕지거리와 폭력이 있었다. 그 위에 맹종이 자리잡고 거짓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대는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하여 사지에도 무작정 뛰어들고 옥쇄도 불사하는 정예병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중국전선에서 5년동안 종군한 모리가네 센슈는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 편에 더 가까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군대가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 양면에서 노예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초기 전장에서 용전분투하며 전승을 달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군대가 그 특징으로 자랑해 왔던 엄격한 군기는 사실 군기 없이는 군대로서의 임무를 달성할 수 없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 일본군대의 군기는 병사의 자발성을 막고 강력한 족쇄를 채우는 것에 의해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강요된 군기는 강제력이 사라지면 붕괴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지휘관을 두려워하는 군대는 지휘관을 신뢰하는 군대보다 결코 강하지 않다’라는 아이젠하워의 말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전선에서도 패배하면 이미 군기유지의 강제력이 사라지고 자발적인 전투의지를 갖지 못한 병사는 파괴되어 무너진다. 필리핀과 버마에서 전쟁 초기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분산된 미국 영국군의 일부는 하나하나 주민 속에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지만, 반대로 일본군 중 패퇴하여 산중으로 달아난 부대는 지휘계통도 상실하고, 게릴라 활동도 불가능하였다. 강제력이 사라져 없어졌을 때 자발성이 없는 병사의 전투의지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휘관 가운데서도 전황이 악화되면 명령을 무시하고 퇴각, 전선이탈 등을 행하는 자가 때때로 있었고, 공격을 받기 전에 식량부족으로 자멸한 부대도 나왔다.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중국의 전장에서조차 항명, 상관폭행, 도망 등의 군기사고가 속출하였다. 본토의 부대에서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였다. 부락이나 촌락에 주둔했던 부대에서는 식량부족, 병기부족으로 염전사상이 팽배했고 탈주나 꾀병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무모한 명령을 내리는 군수뇌부의 권위에 대하여 병사부터 고급장교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많은 반항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패전에 이르면서 군의 권위는 실종되었다.
이처럼 패전직전의 일본군대는 붕괴직전에 있었다. 만약 일본군대가 ‘군기란 복종이지만 상급자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육체의 복종이다. 군기의 본질이란 정신적이고 자발적인 것이다.’라는 제갈량의 말을 이해했다면 군기확립수단으로서 구타 등의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며, 위기를 맞아 그렇게 쉽게 붕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제국일본군의 급격한 붕괴의 이유 중의 하나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평소에는 명령에 순순히 따라오는 일본인의 오랜 복종의 습성과 강압적인 수단으로 맹종을 요구하는 일본군의 체제가 복합되어 형성된 외형적인 군기가 전쟁 말기의 혼란상황에서 통제 및 감시 체제가 무너지자 필연적으로 함께 허물어진 현상이었다. 그러나 보다 큰 근본원인은 대부분의 일본인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아가 확립되지 않아 정신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을 창출할 수 없는 무사상과 무신념의 맹종집단이었다는데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군은 어디에 서 있는가? 제국 일본군의 병영생활의 실태와 패전의 원인을 통해 배우고 또 배울 일이다.
*하정열 "일본의 전통과 군사사상" 263~269 페이지
지금처럼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는' 한국군이라면 저 상황에서 도망치든지 명령이 없어서 어버버하다가 격파당할것이다.
현재와 미래에도
승리하는
진정한 상무정신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