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공학자 2명이 한국인 최초로 '중국공정원'(中国工程院,Chinese Academy of Engineering) '원사'(院士)로 임명됐다고 한다. 이들이 중국 '천인계획'(千人計劃)의 덫에 걸린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올해 말 한국세계지역학회장 퇴임을 앞둔 주재우 경희대 교수가 중국공산당(중공)의 영향력공작(Influence Operation)에 대한 우려를 쏟아낸 것은 지난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서 국가정보원(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과 공동 주최한 한국세계지역학회(KAAS) 동계학술회의에서였다.
'회색지대전략'(Gray Zone Strategy)이라고도 불리는 영향력공작은 군사와 비군사, 평화와 전쟁 사이의 모호한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상대방의 대응을 곤란하게 하고 자신의 정치·군사적 목표를 달성하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전술이다. 평시(平時)와 전시(戰時)의 구분이 없고 모든 것이 전쟁의 수단이자 공격의 대상인 '초한전'(超限戰·un-restricted warfare) 전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중국 정보기관으로서 전 세계를 상대로 영향력공작을 벌여온 국가안전부와 중국공정원, 그리고 천인계획(해외 인재유치사업)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확실히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국가안전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 내 정치인, 사업가, 학자를 포섭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휴민트(인간정보활동·HUMINT)에 투자해왔다는 것은 서구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공정원은 중국공산당의 공학기술전문 자문기관으로서, 중국 공학기술계와 관련한 국가의 기본전략을 제시하고 공학기술관련 연구와 국가경제·사회개발계획에 대한 자문을 수행한다. 중국 공학‧과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중공이 최고의 영예로 부여하는 칭호인 원사(院士)는 14억 중국 인구 중 1300여 명에 불과하다.
주 교수가 우려를 표한 천인계획은 중국의 경제성장 및 산업고도화를 위해 세계적인 수준의 학자 1000여 명을 유치하는 프로그램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지난 2013년에 발간한 '중국의 천인계획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천인계획에 선정돼 유치된 해외인재들은 중국과학원 원사와 중국공정원 원사로 선발될 수 있고, 다양한 형태의 우수한 생활 및 편의여건을 제공받는다.
주 교수는 26일 뉴데일리와 통화에서 "반도체공정‧설계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 세계 바이오 화학산업의 선도자인 이들이 천인계획의 일환으로 유치됐는지, 중공이 무슨 이유로 이들을 선정했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이들이 중공 공학기술전문 자문기관의 원사로 임명된 것이 정황상 우려스럽다는 것"이라며 "서구의 모든 중국 전문가는 천인계획을 영향력공작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주 교수의 이러한 우려는 2017년 천인계획에 선정된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이모 교수의 구속기소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율주행차의 핵심센서 라이다 기술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그는 2020년 중국 충칭이공대 자율주행자동차 연구 과제에 참여하며 카이스트가 보유한 라이다 기술 관련 특허를 중국에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중공을 비판한 연구로 중국 입국이 수차례 거부됐다며 익명을 요청한 모 교수는 "국가안전부는 '중국국제문화교류센터', '개혁개방논단', '중국국가혁신발전전략연구회'를 포함한 전면 조직뿐만 아니라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과 같은 국가안전부 산하의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 이 단체들은 국가안전부 간부들과 국외 대상들 간 소통을 위한 포럼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은 오래전부터 고급정보를 가진 박사급 이상의 국외 인재들을 학술회의를 가장해 포섭하고 정보를 수집해왔다"며 중국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 장쑤성 지부 부국장 쉬옌쥔(徐延军)이 비즈니스 네트워크 플랫폼인 '링크드인'(LinkedIn) 프로필에 있는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화'(华)라는 이름의 제너럴 일렉트릭(GE) 엔지니어를 포섭한 'GE 기술 탈취 사건'을 언급했다.
이어 "국가안전부는 '화'가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링크드인을 통해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며 "국가안전부는 화를 직접 접촉하기보다 중국 난징항공항천대학 직원 천펑(陈峰)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근했다. 화는 결국 2017년 6월 중국 여행으로 위장해 해당 대학에서 GE가 만든 엔진에 대한 세부사항이 포함된 강연을 하기로 했다. 장쑤성 국제과기합작협회 부주임 '취후이'(曲辉)로 신분을 위장한 쉬옌쥔은 화에게 GE가 사용한 복합재료에 대한 자세한 질문을 하고 그의 컴퓨터 파일 디렉터리까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중공이 언론을 대상으로 벌여온 영향력작전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토론자로 나선 이미숙 문화일보 논설위원은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 출신 기자가 작년 관훈클럽 토론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에게 중국인권 개선에 대해 질문했더니, 싱 대사가 '아니, 우리가 기자님을 그동안 얼마나 잘 모셨는데 저에게 공개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어요?'라고 했다"면서 "저는 싱 대사의 그 말이 '언론에 대한 협박'이라고 느꼈다"고 비판했다.
송의달 조선일보 부국장은 "언론사나 언론인들도 중국의 회유‧설득‧매수에 이미 길든 게 아닌가 싶다. 중국 대사관에서는 주요 언론사들 사주와 간부들을 대상으로 정례적으로 1년에 몇 차례씩 아주 거하게 접대한다. 주한 중국대사는 툭하면 유력 언론사들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를 거침없이 얘기한다"며 "중국 베이징 특파원들은 명절 때 중국 정부로부터 마오타이주 같은 것들을 선물을 받고 기사를 안 쓰고 침묵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전문가들은 외국인의 간첩활동을 방지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호소했다. 주 교수는 "'이적(利敵)'행위만 놓고 보면 국내 외국인들의 간첩 의심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저지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포비아'에 빠진 우리의 엘리트 계층에서 중국을 적국(敵國)으로 정의할 리 만무하다"며 "외국인 간첩활동을 방지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원상복귀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미국처럼 '영향력공작센터'를 만들진 않더라도 최소한 '사이버 안보법'은 즉시 제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 '국가사이버안보전략'에는 영향력공작에 대한 부분이 빠져 있다. 이 부분은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며 "영향력공작은 국경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 주로 이뤄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제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 등 해외를 활용해 사이버 공작과 공격을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영상 기조연설에 나선 전직 미국과 일본 정보기관 지도자들은 오는 2024년에는 1월 대만 총통선거‧3월 우크라이나 대선‧4월 대한민국 총선‧9월 일본 자민당 총재선거‧11월 미국 대선뿐 아니라 브라질‧프랑스‧독일‧인도‧인도네시아‧터키 등에서 선거가 예정돼 있다며 중국·러시아·북한의 영향력공작에 대한 민‧관‧학계의 공동노력을 촉구했다.
마이클 모렐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대행은 "중국은 내년 초 대만 총통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영향력공작을 수행 중이다. 러시아는 2016년과 2020년 대선기간에 미국에서 영향력공작을 수행했다"면서 "CIA가 조기에 러시아의 공작을 발견했다면 미국 정부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에 대처할 전략을 고안할 수 있었을 것", 기타무라 시게루 전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은 "패권주의 국가에 의한 영향력공작의 실태를 충분히 분석하고, 이러한 악랄한 활동에 맞서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지의 대책을 생각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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