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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남·북의 극심한 대립과 혼란 속에서 좌익세력은 이념 실천을 목표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하지만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지금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나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유가족과 관련 단체들은 점점 희미해지는 전쟁 당시 기억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땀어린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결과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최근 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세상에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등 다수의 사건 결정서 전문이 실렸다. 국가기록원·보안사령부 등에서 입수한 귀중한 문서·자료 등도 함께 공개됐다. 당시의 인권유린 실상이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본지는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참혹했던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세 번째로 경북지역에서 좌익세력과 인민군이 자행한 사건들을 집중조명했다.
[경북 경산시 박사리 사건]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 빨치산 보복, 32명 살해
1946년 대구에서 시작된 10월 사건과 1948년 말부터 3차례에 걸쳐 발생한 제6연대 반란 등의 영향으로 많은 좌익세력과 반란군들이 대구와 경북 경산에 걸쳐있는 팔공산으로 입산했다. 경산지역은 지리적으로 대구 팔공산을 비롯해 청도 운문산과 영천 보현산 등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의 주요 이동 및 활동 경로가 됐다. 경산지역에서 빨치산으로 인한 피해가 다수 발생하자 토벌을 위한 군경의 작전 또한 활발히 전개됐다.
이 과정에서 토벌에 대한 보복이 자행됐다. 1949년 11월 29일 밤, 빨치산은 100여명이 3개조로 나뉘어 경북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희생자 32명, 부상자 15명이 발생했다. 방화로 인해 가옥 52채가 소실되기도 했다.
사건을 증언한 지역 관계자들에 따르면, 빨치산 습격 당일 저녁 희생자들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제사·생일 등 집안의 대소사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또한 다수의 주민들은 사랑방과 마을회관에 모여 새끼줄을 꼬는 등 소일거리를 하며 담소를 나눴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빨치산은 저녁 8~10시쯤 주로 성인 남성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을을 습격했고, 도주를 하거나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죽창과 칼 등을 이용해 무참히 살해했다.
증언을 한 최○○(사건 당시 17세) 씨는 "빨치산이 문을 열고 들어와 사람들의 나이를 물어봤고, 15살 이상이면 손을 뒤로 묶어서 끌고 갔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을 치면서 마을을 둘러보니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고 전했다.
김○○(사건 당시 16세) 씨는 "형은 당일 저녁 어머니 생신상을 준비하고자 가족들과 놋그릇을 닦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논으로 끌려가 돌로 안면부를 가격당하고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빨치산은 사람들을 끌고 가 몽둥이로 때리고 일본장도로 죽이기도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급하게 죽여야 했는지 집합 장소까지 끌고가지도 않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진술했다.
다른 증언자는 "사건 피해자 박모씨는 집에서 가마니를 짜던 중 빨치산에게 끌려가 배꽃마당에서 목과 등을 칼에 찔려 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또 다른 증언자는 "사건 피해자 배모씨는 빨치산에 의해 집에서 구타를 당한 후 칼에 손목이 절단되고, 어깨를 찔리는 부상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진실화해위는 팔공산 양시골에 근거지를 둔 빨치산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박사리로 이동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건 당시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에 거주한 참고인 박○○(사건 당시 19세)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참고인은 "박사리 사건이 발생하기 전 대한리로 시집을 왔는데 양시골에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있었다. 밤이 되면 가끔 빨치산이 산에서 내려왔으며 빨치산이 이동하는 소리가 집안에서도 들렸다. 빨치산이 팔공산 양시골에서 박사리까지 이동하려면 대한리와 신한리를 지나가야 된다"고 진술했다.
"빨치산 소행, 역사에 묻혀… 어디에 하소연할지 몰라 70년 이상 허비"
현재 경북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반공혼비, 반공희생자위령비가 건립돼 있다. 반공혼비는 대동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1961년 9월 24일 경산시 와촌면 대동초등학교 내에 건립한 위령비다. 반공희생자위령비는 유족회가 1985년 11월 29일 대동초등학교 내에 건립했다. 현재는 박사리반공희생자추모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위령비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반공혼비 내력비
"1949년 11월 29일 한밤중에 팔공산 방면에서 무장공비 수십명이 나타나 박사동을 포위하고 장총 등 무기로 지방민 38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28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가옥 108채를 태워 한 순간에 폐허 만들고 도망쳤다. 그 때 돌아가신 반공 영령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애도하며 후손들에게 길이 반공정신을 심어 주기위해 이 비를 세우다. 이후 긴 세월의 풍상에 혼비 주위가 훼손되어 동문들 모두가 정성을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새롭게 단장하니 모교를 졸업한 동물들과 재학생들은 고인들의 영전에서 옷길을 여미어 나라사랑의 의지와 각오를 새로이 하자." - 서기 1997년 5월, 대동초등학교 총동창회 -
반공희생자 위령비문
"뒷면에 적힌 38인은 모두가 박사동 한마을 주민으로 1949년 11월 29일 밤 9시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처참한 죽음을 당한 반공애국인사이다. 8·15해방에서 5년여 신생 대한민국이 독립한지 일년남짓 비록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 독립국이 되었다해서도 좌우의 사상적인 대립으로 극히 혼란하였으며 발판을 잃은 좌익들이 끝내야 무장공비화하였다. 그들로하여 산촌마을들은 그들의 끊임없는 내습으로 인하여 불안·공포 속에서 그 하루를 편히 지낼 수가 없었으며 청장년들은 반공에 앞장서서 내고장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싸웠다. 1949. 10. 15 나무하러 팔공산 퍽정 양시골에 간 주민이 공비의 본부를 발견하여 경찰당국에 신고한 바 군경합동토벌작전으로 공비 78명을 사살, 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잔존공비 수명이 운문산 공비에게 연락 합세하여 11월 29일 밤, 수 미상의 많은 공비가 박사동을 습격했다. 장총, 큰 칼, 죽창 등으로 반공청장년 38명을 살해하고 28명에 중상을 입혔으며 가옥 108동을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 이 처참하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인하여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자식을 잃은 부모, 남편을 잃은 부인의 울음의 바다가 되어버렸다. 이 얼마나 끔직한 민족의 비극인가. 세월은 흘러 마을은 다시 일어섰고 경산 팔공은 의구하다지만 어찌 그 아프고 따갑던 사실을 잊을 수가 있으랴. 1961년 9월 군내의 뜻 있는 분들이 그날 희생한 분들을 위령하고 그분들의 반공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대동국민학교 뜰에 돌을 세웠다. 그 후 글이 마멸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던 차 염길정 국회의원의 공약과 경산군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뜻있는 지방인사들의 아낌없는 협조로 다시 이 비석을 세우는 바이다. 조국통일의 민족적 여망은 기필코 이뤄지겠지만 그날을 위해 오로지 화합과 단합으로 반공하여 이 땅에 뿌린 고귀한 인사들의 피에 보답해야 할 일이다." - 1985년 11월 29일 반공희생자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 -
김진수 조사과장 "박사리 사건, 단일 사건 중 희생규모 가장 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희생자는 10대(4명), 20대(12명), 30대(15명), 40대(2명), 60대(1명)의 남성으로 박사리와 인근 마을 음양리, 대동리에 거주하며 농업 등에 종사하던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팔공산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이다. 진실화해위는 군경 토벌에 따른 보복으로 빨치산이 박사리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이 희생됐다는 점 외에 다른 희생 이유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진실화해위에서 경북지역 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김진수 조사과장은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박사리 사건은 단일 사건 중 희생 규모가 가장 크다"며 "해당 사건은 1기 위원회에 신청됐던 사건이었으나,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은 분들이 제대로 규명이 안됐기 때문에 2기에서 다시 진실 규명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참혹한 사건인데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진실화해위에서 진실 규명 대상으로 선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과장은 "다만 73년 전 사건이다보니, 구체적인 경과나 세부적인 기억을 실제로 증언할 수 있는 분들이 적어 어려움이 있었다"며 체계적인 관리 기록도 발견하지 못해 당시 미군사고문단정보일지, 경산시지 등을 검토·활용해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했다"고 덧붙였다.
김 과장은 조사 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당시 의료 기록이 없어 상해를 당한 분들의 입증이 어려웠던 점이 생각난다"며 "큰 틀에선 군경의 토벌로 인한 보복이란 이유를 밝혔으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희생 이유를 규명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고 답했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4/04/20230404001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