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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가 트럼프를 재선시켰나?’ 다소 황당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자택을 급습해 기밀문서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자 〈뉴욕타임스〉의 대표적 보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 문구를 자신의 칼럼 제목으로 뽑았다. 트럼프에 대한 FBI 압수수색이 보수 유권자를 총결집시켜 2024년 그의 대선 재선 가능성을 높여줬다는 게 브룩스의 주장이다.
트럼프는 대선에 패하고도 불복 운동을 벌였다. 2021년 1월6일 극렬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난입을 주도한 혐의가 하원 청문회에서 속속 밝혀지면서 사실상 정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상 유례없는 압수수색이 보수층의 반발과 결집을 동시에 끌어내면서 그의 정치적 재기에 결정적 도움을 주고 있다는 분석이 만만치 않다.
8월8일 FBI는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 내의 트럼프 자택을 압수수색해 1급 기밀문서를 포함해 모두 11건을 확보했다. FBI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방첩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압수수색 직후 해당 사실을 직접 공지하고, “전직 대통령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다. 바이든 행정부가 사법 시스템을 무기화했다”라며 비난했다. 그는 자신이 퇴임 직전 해당 문건을 비밀 해제했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다는 의견이다. FBI 압수수색이 알려진 뒤 전·현직 공화당 인사들이 트럼프를 옹호하고 나섰다. 케빈 매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는 “법무부가 정치적 무기로 둔갑했다”라고 비난했고, 공화당 하원 서열 3위 엘리스 스테파닉 의원은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행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겨누고 법무부를 무기화했는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즉각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이면엔 바이든 행정부의 법무부가 트럼프를 기소해 2024년 대선 출마를 막으려 한다는 의구심도 깔려 있다.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밀문서 불법 소지 혐의 외에도 의사당 난동 선동 혐의, 본인 사업체의 회계부정 혐의 등 5건의 민형사 관련 수사를 받고 있다. 웬만한 정치인은 이 정도 사법 리스크라면 일찌감치 정치 인생이 끝났을 테지만 트럼프는 정반대다. 왜 그럴까? 브룩스는 그 이유를 보수층에 먹혀드는 트럼프 특유의 화법에서 찾는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진보 성향의 언론·재단·대학·기업들과 워싱턴의 권력자들을 싸잡아 ‘레짐(Regime) 세력’이라 규정하며 “이 집단은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당파적이고 악의적으로 행동한다”라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때 이런 화법을 애용하며 펜실베이니아주를 포함해 경합 주에 주로 몰려 있는 백인 블루칼라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승리를 거뒀다. 그의 퇴임 후에도 이런 메시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브룩스의 주장이다. 또한 이들은 트럼프 재임 시절 그의 국정 어젠다에 은밀히 저항하던 일부 연방 기관들과 고위 공무원, 주요 언론, 월가 등의 반(反)트럼프 세력을 가리켜 눈에 드러나지 않는 ‘딥 스테이트(Deep State, 심층 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압수수색을 한 FBI와 법무부는 이들에게는 딥 스테이트에 속한다.
이런 열성 팬들의 지지가 식을 줄 모르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공화당 장악력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최근 치러진 공화당 후보 예비경선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올가을 의회 중간선거에서 연방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을 새로 뽑는다). 지난해 1월6일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을 선동한 혐의로 트럼프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하원에서 가결되었는데, 공화당 의원 197명 가운데 10명이 찬성했다. 이들 가운데 8명이 트럼프 입김 때문에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중엔 리즈 체니 의원도 있다. 그는 공화당 내 반트럼프 인사로 민주당이 주도한 하원의 의사당난동조사특위 부위원장을 지냈다. 3선 중진인 그는 트럼프가 미는 정치 초년생 해리엇 헤이그먼 후보에게 압도적 표 차이로 패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에게 반기를 든 후보들이 사실상 전멸했다고 지적했다. 올가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후보들이 트럼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트럼프에 반기 든 후보들 전멸”
공화당 선거 전략가인 존 토머스는 〈워싱턴포스트〉에 “트럼프는 보수 유권자들에게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다. 그가 2024년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고자 한다면 이는 따놓은 당상이다”라고 말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도 트럼프의 대선 재도전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자신도 최근 텍사스주에서 열린 보수 집회에 참석해 “미국을 다시 자랑스럽게, 다시 안전하게,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며 출마 의사를 확인했다.
실제 FBI 압수수색이 알려진 뒤 그의 출마를 원하는 보수 유권자들의 지지도 급상승했다. 〈폴리티코〉와 모닝컨설턴트가 FBI 압수수색 사흘 뒤 실시한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수 유권자 58%가 ‘오늘 대선후보 경선이 진행되면 트럼프를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다만, 최근 들어 공화당 유권자들 가운데 절반은 그의 재도전에 부정적이란 여론조사도 나온 바 있어서 지지율 상승이 FBI 압수수색 반감에 따른 일시적 상승이라는 지적도 있다.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차기 대선의 공화당 유망주로 꼽히지만 트럼프에 비하면 아직은 경량급이다.
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기소될 경우 대선 재도전도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법대 릭 핸슨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방첩법을 어겨 기소돼도 헌법상 그의 출마를 막을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 방첩법 위반 혐의로 연방 교도소에 있던 유진 데브스가 1920년 대선에 출마한 전례도 있다. 미국 헌법엔 범법자의 대선 출마를 막거나, 출마해 승리했을 경우 이를 부정하는 조항이 없다. 그래서 법무부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밀문서 불법 소지 혐의로 기소해도 그는 출마할 것이라고 보는 관측이 대부분이다.
NBC 뉴스는 “기소되면 오히려 지지층에 박해 이미지를 심화시켜 정치적으로 득이 된다고 트럼프는 생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하버드 대학과 여론조사기관 해리스가 2024년 대선을 가상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이 45%를 얻어 바이든 현 대통령에게 4%포인트 앞섰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와도 7%포인트나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FBI 압수수색이 트럼프에겐 치명타가 아닌 정치적 ‘생명줄’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