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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선 미꾸라지는 용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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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에베베

우린 자아를 가진 인간이라서 "수치는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지위가 높을수록 수치심과의 상관관계가 비례할 것 같지만, 정작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면, 그들은 수치심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치스러운 그 순간만 잠시 모면하면 그뿐이다. 그저 거리낌 없이 두꺼운 민낯을 내밀며 그 순간을 무사통과한다. 그들의 특징이 '나르시시즘과 쇼비니즘'이 몸속 깊숙이 박혀있어서 부끄럼 또한 깡그리 무시한다.


 어디에 있든, 늘 줄 세우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온갖 모략을 꾸민다. 이들이 집단으로 붙어 다니며 화합하는 척하지만, 개인 이익만 추구하는 소인배들이다. 대선 후보 곁에 그런 자들이 많으면 미래는 뻔하다. 하지만, 정작 군자(대인)는 화합하되 붙어 다니진 않는다. 논어에서 이를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쓰여 있다. 


 소인 집단이 많은 곳에서 대인(준표형)을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집단으로 붙어 다니며 선동한 짓에 당심은 흔들렸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민심은 저런 선동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민심에 이겼지만, 당심에 졌다. 당의 선출 방식이 설사 악법이라도 받아들였고 백의종군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 흔든다. 능청스럽게 거짓 얼굴을 하면서 점잖은 척 가부좌 틀고 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뭐 소수라서 괜찮겠지라며 단정 짓지 말자. 그들이 미는 후보가 대권을 잡는다면 또 다른 이권에 개입할지도 모를 일이다. "방임도 죄"가 될 수가 있다. 


 과거에 그들이 소수여도 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치심 없는 자들의 모습도 겉으로는 대중 앞에서 (영혼 없이) 고개 숙이는 척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되레 군림했다. "위선자에게 베푸는 용서는 관용이 아니다." 이런 자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그 사회의 도덕은 병들게 되어 있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는 사회는 너도, 나도 한탕주의에 빠졌다. 전염이 빨라서 누구도 죄악시 않는다는 것이다." 2008년 서브 모기지 사태 때, 리먼 브러더스의 '유능한 인재'들이 벌인 도덕적 해이를 그 당시는 몰랐다. 그들은 파생상품인 '주택 담보부 채권'을 대량 보유하면서 파산했다. 

 

 전자에 언급했던 방임, 그 '방임경제'로 인해 도덕적 해이가 모두에게 전염되어서, 전부 수치심을 모르게 되었다. 


  단추를 풀 때, 단추의 얼굴이 사악하게 찌그러져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린 단추의 좋은 기능만 생각할 뿐, 그 단추로 인해 우리의 몸이 지배당할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수치심 없는 위선자들은 작은 단추처럼 큰 몸을 제어하듯, 그들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대중을 장악하려 든다. 


 그들에 의해 지배당하는 국민은, 뒤늦게 분노가 몸처럼 부풀어 올라도 똘똘 뭉친 '완곡한 위선자'들의 사선을 넘을 수가 없다. 안타깝지만, 그들이 만든 '사악한 제도와 정치' 때문에. 


  대선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국민이 위선자를 가려낼 방법은 투표밖에 없다. 하지만, "뽑을 대선 후보자가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깨끗한 후보가 환생하길 다시 기다려보자. 하늘은 늘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무대홍". 그는 아마 홍익인간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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