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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기적’ 벌어진 그 날의 한가위

오주한

신라 때부터 시작된 추석, 민족화합 大축제로

베를린장벽 붕괴도…본연의 정신 되살아나길

 

우리 민족 최대명절인 추석(秋夕‧한가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여느 해처럼 많은 국민이 설레임 반 기대 반으로 민족대이동에 나서고 있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의하면 추석은 삼한(三韓)시대 초기에 이미 명절이었다고 한다. 신라 3대 국왕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은 도읍 안 부녀자들을 두 패로 나눈 뒤, 7월15일부터 8월 한가위까지 두레 삼 삼기 시합을 벌이도록 했다.

 

물론 사생결단(死生決斷)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경연(競演)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으며, 진 쪽은 이긴 쪽에게 한 턱 후하게 쏘는 적마경기(績麻競技)에 나섰다. 그리고 승자‧패자 모두 어울려 회소곡(會蘇曲) 등을 부르며 춤추는 가배(嘉俳)를 즐겼다. 참고로 이 가배에서 변형된 게 한가위라는 설이 있다.

 

신라의 추석 풍습은 외국에서도 유명했던 모양이다. 일본 사서(史書) 니혼쇼키(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승전일(勝戰日)로 기리며 즐겁게 보냈다”는 식의 내용이 있다. 9세기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엔랴쿠지(延曆寺)의 승려 엔닌(円仁)이 9년간 당(唐)나라 여행을 다녀오며 쓴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신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린 날을 기념했다” 기록했다.

 

신라 이후 역대 왕조(王朝)도 추석을 민족명절로 삼고 소놀이‧거북놀이‧강강술래 등 여러 행사‧놀이를 세시풍속(歲時風俗)으로 전승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한가위가 되면 사람들은 추석빔으로 갈아입었다. 지주(地主)‧양반 계층도 집안머슴들에게 따뜻한 가을옷을 한 벌씩 새로 지어 입혔다. 특별히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머슴은 농우(農牛)에 태워져 마을 한 바퀴를 돌았으며, 이듬해에는 더 많은 새경이 주어졌다.

 

길손을 맞는 집은 마당에 술상을 차리고 풍물을 치며 손님을 대접했다. 마을농부들은 두 사람이 둥근 멍석을 쓰고 앉아 머리‧꼬리를 만들고서 거북이 시늉을 내며 찾아가 “용왕(龍王)께서 보낸 사자가 목이 마르구나” 능청 떨었다.

 

이들은 한 집에서 실컷 먹고난 뒤 다른 집으로 이동했다. 이 때 얻은 음식 중 상당수는 마을사람 중 가난해 미처 제례식(祭禮食)을 마련 못한 이들에게 전달됐다.

 

이처럼 융화(融和)의 명절 추석 때 공교롭게도 국제사회를 훈훈하게 만든 화합(和合)의 대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바로 베를린장벽(Berlin Wall) 붕괴와 사회주의 동독의 패망 즉 동‧서독 통일이었다.

 

1990년 10월4일자 특파원발(發) 국내 일간지들 보도에 의하면 동월 2일 오후 11시55분 베를린 빌헬름황제기념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에서는 평화의 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추석 당일인 10월3일 0시, 구(舊) 제국의회의사당 앞 국기게양대에는 검정‧빨강‧노랑의 대형 통일독일 국기가 게양됐다.

 

“독일조국(祖國)이여 번영하라” 광장에 운집한 수만 군중은 45년만의 조국통일 지켜보며 감격의 눈물과 함께 독일국가를 합창했다.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 Gate) 근처 맥줏집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가족과 함께 축배 들던 현지주민은 한국 취재진에게 “우리의 만남은 상징적이다. 두고 봐라. 한반도에도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귀향(歸鄕)에 나섰거나 준비 중이다. 북한도 1988년부터 추석 당일을 공휴일로 지정 중이다. 웃음꽃 속에 더러 갈등이 피어날 수도 있다. 모쪼록 올해 한가위는, 비록 거창한 소원일지 몰라도, 그 본연(本然)의 정신과 상징적 사건의 훈훈함 되살아나 일가(一家)의 화합, 나아가 국론(國論)통합‧남북통일의 한 계기가 될 수 있길 나지막이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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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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