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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명 회복죽 끓인다는 ‘늙은복어’

오주한

‘권력저항’ 떴다가 총선 앞 ‘권력아부’ 나선 늙복 A씨

약자팔이→실세기생 韓 청년정치 자화상에 장탄식만

 

독재권력 목숨으로 저항한 유학자들

 

오늘은 약 ‘2200년’ 간극(間隙) 두고 붕어빵행보 보이는 두 사람에 대해 논(論)해보려 한다. 겉으론 고고(孤高)하고 정의로운 척 떠벌리다가 천하의 폭군(暴君) 앞에선 넙죽 엎드린 기원전 3세기경 유학자(儒學者) 숙손통(叔孫通), 그리고 흡사한 길 걷는 서기 21세기경의 ‘여의도 2시 청년’ ‘늙복(늙은복어)’ A씨가 주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수백년 간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막을 내린 건 진(秦)나라다.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생몰연도 기원전 259~기원전 210) 사후 환관 조고(趙高) 등 간신들은, 영정의 18남 영호해(嬴胡亥‧기원전 230~기원전 207)를 황위에 추대했다.

 

즉위 당시 나이(20세)도 어리고 본성(本性)마저 악하고 어리석은 호해는, 권력을 한 손에 쥐자 걸주(桀紂)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막장정치 펼쳤다. 조고 등과 공모(公募)해 어질고 현명했던 맏형 영부소(嬴扶蘇) 및 명장 몽염(蒙恬)을 자결케 했다. 또 제 황권(皇權)에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형제‧누이 상당수도 갈가리 토막 쳐 진시황릉(秦始皇陵)에 생매장했다.

 

걸림돌이 사라지자 호해는 조고에게 국정(國政)을 일임하고 자신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허우적댔다. 대규모 토목공사는 기본이요, 수탈‧학살은 옵션이었다. 흉년에 줄초상 겪고, 갓 쓴 도둑 즉 관적(官賊)들에게 핍박 받던 백성은 결국 폭발해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을 일으켰다.

 

자연히 유가(儒家)‧법가(法家) 등 뜻 있는 선비들은 호해에게 목숨 걸고 직언(直言) 올리길 마다치 않았다. 실제로 이들 다수는 조고‧호해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술책에 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학(儒學)은 탄생부터가 충의(忠義)와 연관 깊다. 초창기 유학자들은 기원전 11세기의 주(周)나라 섭정(攝政) 주공단(周公旦‧희단)으로 상징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천자를 받들고 외세를 물리친다) 사상을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나아가 정명사상(正名思想)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후대 유생(儒生)들은 정명사상을 위해선 신하가 충언(忠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래도 안 되면 만천하를 위해 폭군을 ‘끌어내려야 한다’ 단언했다.

 

순자(荀子‧기원전 298?~238?)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한 동명(同名)의 책 왕제(王制)편에서 군주민수(君舟民水) 즉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기도 한다”고 했다. 맹자(孟子‧기원전 372~기원전 289)는 “(정치에는 간계가 아닌) 다만 인의(仁義)만이 있을 뿐이다. 사방 국경 안이 (인의로서)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임금을 파면해야 한다” 촉구했다.

 

실제 행동도 빈번했다. 초장왕(楚莊王) 웅려(熊侶‧?~기원전 591)는 즉위 초 폭탄주로 세월 보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선비였던 오거(伍擧)란 신하는 참다못해 “어떤 새 한 마리가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았다. 무슨 새일까요?” 퀴즈 냈다. 웅려는 “한 번 날았다 하면 하늘을 찌르고 울었다 하면 만인(萬人)을 놀라게 할 것이다” 답했다.

 

웅려의 이러한 행각은 실은 충‧간신을 가려내기 위함이었다. 속으론 큰 웅심(雄心) 품고 있던 웅려는 “그대 뜻이 무엇인진 알았다” 말하면서도 “또 입 놀리는 녀석은 그 목을 어깨 위에 남겨두지 않겠다” 엄포 놨다.

 

그럼에도 소종(蘇從)이란 이는 재차 나서서 “이 한 몸 죽어 임금을 깨우치는 게 신(臣)의 책무입니다” 목소리 높였다. “이런 충직한 이들과 함께라면 대업(大業)은 가능하다” 결심한 웅려는 나라를 성공적으로 경영해 춘추오패(春秋五霸) 반열에 올랐다.

 

남들 “아니다” 할 때 홀로 “맞다” 태도 급변한 말종

 

허나 문제의 인물 숙손통은, 그도 유학자로서 평소 “충신은 충신다워야” “목숨 내놓고 행동해야” “내가 제2의 오거‧소종이다” “쇄신 필요” 외치는 인의군자(仁義君子) 행세했을 것임이 틀림없음에도, 국록(國祿) 먹는 관료‧학자로서의 양심 따위는 개나 줘버렸다. 그는 우르르까꿍 하면 앞발 내미는 호해의 주구(走狗)가 돼 철저히 권력과 야합(野合)했다.

 

조고가 친 가림막 뒤에서 천지분간 못한 채 연일 취해 늘어져 있던 호해는 뒤늦게 진승오광 반란소식 접했다. 그는 만조백관(滿朝百官) 소집해 대책을 물었다. 당연히 여러 유생들은 “당장 간신무리 내치고 폐하께서 몸소 친정(親政)해 신속히 군(軍)을 소집해야 한다” 입 모았다.

 

그런데 숙손통은 이들과 함께 하는 대신 호해 안색을 살폈다. 호해 얼굴은 분노로 처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 분노는 “감히 도적들이 민생(民生) 어지럽히다니” 차원이 아닌, “짐(朕)의 선정(善政)으로 하루하루가 태평성대(太平聖代)인데 저 유자(儒者)놈들이 거짓말로 짐을 기만하는구나”가 이유였다.

 

간지(奸智)에 능했던 숙손통은 홀로 호해 앞으로 나아가 “저놈들 말은 다 ‘구라’입니다. 진승은 일개 도둑떼이니 지방관리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입니다. 폐하의 신무(神武)하심이 이렇듯 강성한데 반란은 무슨 놈의 반란이랍니까” 침도 안 바른 세치 혀를 놀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 탄복한 호해는 숙손통에게 산더미 같은 비단옷 하사하고 큰 벼슬도 내렸다. “이제 내가 얻을 건 다 얻었다” 여긴 숙손통은 호해를 내다 버리고서 그 길로 저 혼자 낙향(落鄕)‧잠적해버렸다. 숙손통은 타 관료들이 “명색이 유학자로서 어찌 그리 아첨에 능한가” 꾸짖자 “내가 안 그랬으면 우리 모두 화(禍)를 당했을 것” 태연히 답했다. 숙손통 대답이 무색하게 나머지 관료 태반은 호해에게 끔찍이 처형됐다.

 

얼마 못 가 호해가 정말로 목숨 잃고 천하대세가 항우(項羽) 일가에게로 기울자, 숙손통은 이번엔 항씨(項氏)에게 빌붙었다. 나중에 초한전쟁(楚漢戰爭)에서 항우 측 패색 짙어지자 그 때는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엎드렸다. 무려 세 번이나 주군(主君)을 갈아치운 것이었다.

 

한왕 진영에서도 숙손통은 특유의 간지 발휘했다. 그는 “한왕이 길고 통이 넓은 유복(儒服‧유생들 의복) 싫어한다 하더라” 소문 듣자, 자신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짧은 옷으로 환복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한왕께선 돌과 화살 두려워 않고 천하를 다투는데 서생(書生)이 무슨 쓸모인가”라며 제 얼굴에 침 뱉기도 서슴지 않았다.

 

숙손통은 승자(勝者) 한왕이 한고조(漢高祖)로 즉위하자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실전된 예법(禮法)들 간략히 압축‧정리해 “내가 이제야 황제 귀한 줄 알겠구나” 한고조의 칭찬도 이끌어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저술한 훨씬 후대의 대학자 사마광(司馬光‧서기 1019~1086) 등은 “저 치 때문에 사회풍속이 문란해졌다” 분통 터뜨렸으나, 숙손통에게는 예법 망친 공로로 황금 수백 근이 수여됐다. 농민 출신으로서 학문에 어두웠던 한고조를 속여 넘기는 건 숙손통에겐 일도 아니었다.

 

숙손통과 제자들 파당(派黨) 이른바 숙가파는 황금 나눠 갖고 낭관(郎官) 등 고관(高官)에 제수(除授)됐다. 이 모든 게 숙손통의 ‘양심팔이·철면피(鐵面皮)’ 덕택이었다.

 

한국청년 누구도 공감 못하는 그들만의 청년잔치

 

‘늙복’ A씨의 행보가 가관(可觀)이라는 비판적 목소리 높다. 그의 작태 두고 각계에선 “서민살이 근처에도 안 가본 정치판 10시‧2시 청년들이 기성(旣成)정치인처럼 약자 팔아 권력 추구하는, 자칭 대한민국 청년정치 자화상(自畫像)이자 현 주소”라는 자조적(自嘲的) 목소리 높다.

 

1990년대 중반생으로서 한 때 더불어민주당 중책(重責) 맡았던 A씨는 그간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강도 높게 성토해왔다. 이 대표 등 친명(親明)계의 사당화(私黨化) 의혹을 규탄하고 민주당이 약자를 위한 민주당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장해왔다. 그는 이 대표 사퇴도 촉구했다. 할 말은 하는 똑 부러진 이미지 때문인지 A씨는 여야 막론하고 상당수에게 호감 받아왔다.

 

허나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A씨는 11일 이 대표 단식농성 천막에 돌연 등장해 이 대표를 접견했다. 그리고는 ‘눈물’ 주륵주륵 흘리며 “건강이 걱정돼서 왔어요. 제가 회복식(回復食) 만들어 드릴게요. 단식 그만하시고 저랑 같이 (여당에 맞서) 싸워요” 등 취지의 발언 쏟아냈다.

 

공교롭게도 이 대표는 당무(黨務) 지휘봉을 절대 내려놓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당대표가 총선 등 공천(公薦)에 상당한 입김 발휘한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이 대표 단식장을 찾지 않는 인물을 기록하는, 민주당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살생부(殺生簿)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12일 SBS라디오에서 A씨 모습에 대해 “중간단계 없이 갑자기 저렇게 (비명에서 친명으로) 급반전되니까 개인적으론 굉장히 초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Grotesk‧기괴)하다” 평가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는 같은 날 CBS라디오에서 “그동안 A씨 스탠스라면 (이 대표의) 단식농성을 비판해야 된다. 눈물 흘리면서 ‘회복식 제가 만들어드릴게요’ 이건 뻔한 거 아니냐” 했다.

 

비단 A씨뿐만 아니라 여야에선 지금도 직업‧경력은 무엇인지, 정치철학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면서 “청년”만 주구장창 외쳐대는 물건들 난무(亂舞) 중이다. 생물학적 나이만 더벅머리이면서, 기성세대보다 더 한 철면피적 태세전환 일삼으며, 제 권세‧축재(蓄財)에만 관심 있는 듯한 물체들이 횡행한다.

 

정작 이들에게 적극 공감하는 ‘진짜 사회’의 ‘진짜 청년들’은 없다. 이 나라가 더 곪아 터지기 전에 ‘늙복’ 아닌 ‘공복(公僕)’이 시급히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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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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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dol7707

    아마 반우파투쟁처럼 갈지도 모르겠네요.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9.13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본 칼럼에서의 '늙은복어' 표현은 결코 아버님어머님 세대를 비하하려는 의도 아님을 말씀 올립니다. A씨 별명 '아기OO'에 대비해 표현을 잡다 보니 그렇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존경하는 어르신들 입장에선 저 또한 아기이겠지만, 감히 말씀 올리자면 40살 조금 넘은 저도 어디까지나 20대인 A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이 좀 더 먹은 입장에서 써 봤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삼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쌀강아지

    복어대신 제가 끓여주고 싶네요

     

    팥죽 녹두죽 잣죽 콩죽 김치죽 계란죽 교대로

    죽뿐만 아니라 김치말이국수 바지락칼국수 회냉면 건진국수 잔치국수 비빔국수 돌아가면서

  • 쌀강아지
    ydol7707
    @쌀강아지 님에게 보내는 답글

    찢은 밥상 걷어 찰듯

  • ydol7707
    쌀강아지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왜?? ㅋㅋㅋㅋㅋㅋㅋ

  • 쌀강아지
    오주한
    작성자
    2023.09.16
    @쌀강아지 님에게 보내는 답글

    아마추어 요리광으로서 복어해체 영상 보며 독학으로 조금 공부했습니다만(물론 실제 이행하진 않았습니다만), 복어는 기능사 자격증 필요할 정도로 손질 잘 해야 사람이 뒷탈 없다고 하더군요. 패조류도 껌 씹듯 먹는 애들이라 잘못 물리면 손가락도 날아간다고 합니다.

     

    10시니 2시니 몇 시니 하는 일부 여의도 섬동네 귀족백수 청년들은 부디 자신에게 사회해악적 독은 없는지 돌이켜보고 스스로 잘 손질하길 바랄 뿐입니다.